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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비 Sep 27. 2022

여자 혼자 등반합니다

DAY2 팔영산 국립공원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중 팔영산 야영지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났다. 산 중턱이라 그런지 밤 새 쌀쌀하고 축축했는데 침낭 대신 가져온 오리털 이불 덕에 꿀잠 잤다.

차로 여행할 때 좋은 점은 뭐든지 일단 때려 넣고 필요할 때마다 쓸 수 있다는 점. 이번 여행은 미니멀 안 하기로해서 추위걱정이 없다.

침낭 대신 오리털 이불 플렉스


어제 산 무화과를 프린스 앤 프린세스(90년대생 필수 애니) 왕처럼 포식하고 호기롭게 팔영산에 올라간다.

이정표를 보니 중간부터 매우 어려움 코스라고 적혀있다. 매우 어려움이 어느 정도지? 나 히말라야도 갔다 온 사람이야-라며 별 생각없이 시작했다. 이름에 ‘악’자도 안 들어가는데 바위며 돌이며 엄청 많고 군데 군데 ‘심장마비 사망지역’ 경고표시가 세워져 있다.


약간 쫄았지만 무사히 팔봉 중 1봉(유영봉) 도착. 아직 미친건 아닌데 미쳤다 미쳤다 소리를 엄청 해댔다. 다도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일 정도로 장관이고 날씨도 환상적이다. 한 삼심분은 사진 찍어대고 도시락 맛나게 먹었다.


이제 2봉 가볼까나- 힘찬 마음으로 향하는데 아니 여기는 다른 의미로 미쳐있었다. 계단이 무슨 90도 가까이 돼있으니 이거야말로 천국으로 가는(혹은 보내버리는) 계단인거다. 방금 마신 게토레이가 나올 것 같은게 팔영산이 진정한 이뇨제다. 네발달린 짐승이 되어 한참을 열심히 오르고 깨달았다. 여기부터가 이정표에서 말한 ‘매우 어려움’ 코스라는 것을. 과장 조금 보태서 자연 볼더링장이다. 전부 바위인데다가 엄청 가파르고 바람도 세게 부는 것이 정신이 혼미했다. 진퇴양난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진: 진짜진짜 이건 아니지

퇴:퇴퇴퇴 취소다 나 돌아갈래

양:앙 제발요

난:난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네발로 겨우, 아니 엉덩이까지 합쳐서 다섯발로 4봉까지 올라왔다. 앞으로 남은 봉우리는 4개. 반 밖에 안왔네? 아니아니 반이나 온거지. 삐딱한 마음을 고쳐먹고 5봉으로 출발하려는데 내 핸드폰이 없어진거다.

(10)팔영산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백만원짜리 보물을 찾기 위해 왔던 길을 샅샅히 살피며 되돌아갔다. 4봉 넘어 3봉, 3봉 넘어 2봉, 그리고 2봉에서 내려가는 바로 그 길목에서 핸드폰을 찾았다.


기쁨의 눈물도 잠시 이 봉우리를 다시 넘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눈물이 흘렀다. 어떡하지 갈까 말까 아니 그냥 집에 갈까?ㅠㅠ 고민을 고민을 하다가 내 나이 28살 이제 어른인데 포기할 줄 알아야지 그래 포기하면 편해 데헷- 생각하고 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분명 발이 아팠는데 내려가는 길 내내 발걸음이 가벼웠다. 콧바람이 절로 나오고 팔영산도 아름답고 바위 넘어 보이는 파란 섬들도 아름답고 맑은 하늘도 아름답고 그냥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내려가는 길에 나와 같이 4봉까지 갔던 청소년들도 만났다. 그들 왈 야 옛날에는 6봉까지 갔는데 오늘은 진짜 못가겠다 개힘들어- 나는 속으로 오늘 포기한 우리 다 같은 편이야 라고 생각했다.

포기하면 편한게 마음과 몸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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