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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비 Dec 29. 2022

걷는 사람

백운산을 걷는 사람

벌써 구례에 온 지 4일 째.

하루의 시간을 온전히 느끼다보니 하루가 참 길다. 서울에서는 한달의 시간도 너무 쉽게만 흘렀는데 이 곳에서의 한달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더디게 간다.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드는 기분은 참 좋다. 잘 통제해서 내 옆에 두면 행복할 것 같다. 

아침에 런던 그래머를 들으며 백운산으로 향했다. 조금 흐린 날씨에 어떤 모습의 설산이 펼쳐질 지 잘 그려지지 않았지만 그 길이 좋았다. 쌩 쌩 달리며 손에 닿지 않는 아쉬운 풍경을 지나치는 것이 꼭 내 욕망이, 무언가를 원하는 감정이 생겨나는 그 찰나의 순간과 아쉬움이 내 권태로움을 지워버리는 그 기분이 참 좋다. 무언가를 원하는 감정이 생겨난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나 소중하다. 


백운산 입구부터 하염없이 걸었던 것 같다. 

나는 걷는 사람. 걸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

이 생각을 꼭 붙든 채 걸었다. 내가 걷는 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시 깨달으면서 걸었다. 비록 머릿속 잡다한 생각들은 정리되지 않은 채 나를 따라 오지만, 온전히 혼자서 내 머릿속 생각들과 마주한다는 것이, 그 슬픔과 위로가, 너무나 소중하다. 

천천히 내 발걸음을 느끼고 평소에 눈치 채지 못하던 몸의 감각을 느끼고 바람의 소리와 무게를 피부로 느끼는 그 행위들이 너무나 소중하다. 걸음으로써 마음에 가득한 무엇을, 넘치면 아슬아슬하게 나를 덮칠 무엇들을 조금씩 덜어낸다. 점점 안전해진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고 조금씩 지쳐가는 찰나에 정상에 도착했다. 아찔하리 만큼 세찬 바람이 덮쳐도 그 바람 밑으로 보이는 것들 때문에 내려갈 수 없었다. 넓게 넓게 펼쳐진 산맥들과 그 사이 사이로 보이는 눈에 덮인 골짜기, 하늘의 색만큼 푸른 능선, 그리고 시선을 돌려 마주친 거대한 지리산까지.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순간 옛날로 돌아갔다. 아이처럼 팔짝팔짝 뛰며 구름에 숨겨지는 지리산 봉우리를 기다린다. 찰나에 마주치는 그 맑은 모습을 놓치지 않도록 끈질기게 그 곳을 바라본다. 

와. 아름답다.

말하고 또 말했다. 아름다움이 사라질 것 처럼 부르고 또 불렀다. 언젠가 저 곳에 올라가보겠다는 희망찬 다짐을 하면서 어린아이의 모습을 품고 내려간다. 산은 나를 휘저었다가도 평온하게 해준다. 잡념들을 산 위에 털어내고 벅찬 가슴을 가지고 내려오게 만든다. 순간이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든다. 슬픔을 제대로 마주하도록 충분한 시간을 준다. 그 생생한 순간들과 순순함 때문에 나는 계속 산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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