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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Aug 19. 2023

문제와 문제 아닌 것


별것도 아닌 것을 문제로 만들어서 확대시켰다가 나중에는 어쩔 줄 모르는 경우들이 있다. 긁어 부스럼이란 말이 이런 상황을 말해준다. 반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해서 조기에 진화를 하지 못해 더 큰 문제로 만드는 경우들도 있다. 문제를 보는 안목이 부족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두 경우를 보면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많은 문제들이나 갈등 혹은 대부분의 논쟁들이 이 두 가지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제를 문제로서 정확히 인식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너무나 사소해서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가지고 말싸움으로 소모적인 논쟁을 벌인다든지, 아니면 정말로 중요한 문제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삽 질을 하는 경우가 그렇다. 우리 속담에 "자다가 봉창 두들긴다"는 그런 점에서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대해 말을 하거나 비판을 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그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인식과 판단이 필요하다.




일찌기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숫염소의 젖을 짜려고 하니까 그 밑에 통을 가져다 놓는 경우를 예로 든 적이 있다. 숫 염소의 젖을 짜는 것 자체가 가당치도 않은 일인데, 또 그 밑에 통을 가져다 놓는 어리석은 행위들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문제거리도 아닌 것을 가지고 갑론을박 쌈질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고래의 형이상학 논쟁을 마감하려 했다. 대표적으로 그가 비판한 ‘안티노미’론에서는 우주의 시초가 있다는 말도 맞고, 시초가 없다는 말도 맞다. 하나의 현상에 대해 둘 다 맞는 이런 상황은 형식논리에 비추어 본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각각의 주장들이 경험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다 보니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대부분의 형이상학 논쟁들이 오십보 백보이다.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갑론을박하는 형국인 것이다.




현대는 어떤 일의적 기준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복잡계와 같다. 이런 시대에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지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일종의 실천적 지혜(phronesis)이다. 이런 지혜는 단순히 가방끈이 길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경험을 반성하고 숙고하면서 교정해나갈 때 얻어지는 지식이다. 이런 실천적 지혜는 과학적 지식이나 수학적 추론과 달리 검증이 쉽지 않고 필연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비록 개연적이고 확률적이지만 사물과 사태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런 지혜에 비추어 보면 우리 시대의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이 얼마나 모지리인지를 단박에 알 수가 있다. 그들의 행태에 대해 일희일비하거나 부화뇌동할 필요가 전혀 없다.




문제를 보는 정치가들의 안목은 현실 정치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뛰어난 정치인들은 그 시대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해서 그 해법 까지도 모색하는 반면, 저급한 정치인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과 감정만 자극해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게 만든다. 정치인에 관한 이런 기준은 여나 야, 진보나 보수 모두에게 해당된다. 국민들 역시 어떤 정치인들이 참으로 현실 문제를 잘 보고 있고 또 그것을 풀어낼 수 있는 역량(Virtus)이 있는 가를 잘 파악해야만 한다.




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을 문제로 생각한다. 이런 사건들에는 개인의 주객관적인 체험에서 시작해 한 사회 및 세계 전체의 공통된 문제들 모두가 포함된다. 이런 문제들에는 고통과 구원에 관련된 종교적 문제들, 예술적 창작에 관련된 문제들,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투쟁과 같은 정치적 문제들, 밥그릇을 둘러싸고 벌이는 이해관계 집단들 간의 경제적 문제들, 국가들 간의 크고 작은 외교적 문제들과 전쟁들처럼 이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이 다 문제에 포함될 수 있다.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을 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푸는데 골몰하기 보다는 그런 문제들을 불평 비난하고 비판 개탄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입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과거에 잡히는 일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을 벗어나 미래로 나갈 수 있는 해결이고 해법이다. 개인적인 고민이 있으면 그 원인을 알아내서 풀어내고, 돈이 없으면 돈을 벌고, 밥이 없으면 밥을 만들어 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타인들과의 갈등이 문제면 그 원인을 찾아내서 해결하는데 힘써야 한다. 다시 말해 문제가 일어났을 때 과거에 매여서 불평 불만을 터트리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미래의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같은 맥락에서 철학의 역할도 문제를 만드는 이상으로 문제를 푸는 일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푸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는 문제가 문제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일이다. 앞서도 이야기했듯,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문제인 양 간주해서 허구헌 날 고민하는 것도 문제이다. 다음으로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삶을 고통으로 본 부처는 이 고통의 원인을 밝히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깨우쳐 주었다. 마찬가지로 20세기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문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파리 통 속에 갇힌 파리들’이라는 비유로 설명했다. 그들에게 파리 통을 탈출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철학이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잡계와 같은 현대는 철학이 불필요한 시대가 아니라 참으로 철학을 요구하는 시대하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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