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불교 철학자 김원명 선생이 원광대에 있는 조성환 선생의 글을 언급한 포스팅을 보았다. 조성환 선생은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은 전통을 계승하는 동양적 정신의 특징인데 반해, 서양적 정신은 새것을 모색하는 창의적 정신이 강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을 생각해보면 반드시 그렇게 일반화하기 힘들 수도 있다. 김원명 선생은 이점을 무시하고 조성환 선생이 술이부작(述而不作)만을 이야기했다면 더 이상 주목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가 공자의 여욕무언(予欲無言)을 이야기해서 관심을 두었다고 말한다. 평생 천하를 주유하면서 말로 군주들을 상대했던 공자가 갑자기 무언(無言)하겠다고 하니까 자공이 놀라서, "선생님께서 아무 말씀도 안하시면 저희들은 무엇을 받아 적나요?"라고 반문한다. 공자가 이에 대해,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시가 운행되고 만물이 생성되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라고 답한다. 조성환 선생에 따르면 공자의 '여욕무언'은 일종의 사상적 전환의 의미도 있지 않을까라고 이야기한다. 평생을 말을 중시하던 공자가 무언을 이야기하니까 생각의 근본적인 전환이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이다.
여기 나온 구절을 액면 그대로 해석한다면 무언은 하늘이 사시운행과 만물생성으로 보여주듯 성인인 공자 자신도 이제는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저 보여주고 행동할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굳이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도 없고, 호불호를 가지고 따질 필요도 없다. 진리는 그 자체로 드러날 뿐 그것을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 가깝다. 만약 여기에 가타부타 이야기하고 호불호를 이야기한다면 번쇄해질 뿐 아니라 오해도 사고 원래의 뜻도 왜곡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마치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 표현에서 이야기하려고 했듯, 무엇을 무엇이라 규정하면 그 무엇을 가리고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 자신이 말하려는 도는 바로 이와 같기에 공자가 여욕무언(予欲無言)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말년의 공자는 자신이 평생 말하고 실천해온 '언어의 세계', 세간의 세계를 넘어서고자 한 것일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조성환 선생이 이야기했듯, 공자가 일종의 사상의 전환을 꾀하려는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공자가 평생 쌓아 놓은 언어의 세계를 스스로 부정하고 무너뜨리려 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할 수 있다.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고 언어를 부정하려는 철학들이 있다. 가령 서양의 신비주의자들이나 영지주의자들에게서 언어는 그들이 지향하는 절대자, 일자를 아는데 장애물로 간주된다. 이 점에서 언어 도단과 불립 문자를 강조하는 선불교의 정신도 큰 차이가 없고, 노자가 말하는 '도'(道)도 마찬가지이다. 임마누엘 칸트가 말하는 '물자체'(Ding an sich) 역시 언어로 규정이 불가능한 세계이다. 인간의 의식과 언어는 물자체의 촉발을 받을 때만 가동되는 수동적 정신이다. 의식은 끊임없이 과학의 언어를 넘어서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초월일 뿐이다. <논리-철학 논고>(Tractatus)를 쓴 청년 비트겐슈타은 가능한 세계에 대해 잔뜩 논증한 다음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게 구분이 된다. 언어는 말할 수 있는 세계에서만 통용이 되고, 그 이상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 청년 비트겐슈타인이 도달한 결론이다. 이러한 침묵은 공자의 무언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공자 역시 평생을 언어의 도를 이야기했지만, 그것으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인정하는 것은 아닌가? 그가 말하는 이 세계는 하늘의 도와 같이 그 자체로 드러남의 세계이고 행동의 세계이다. 여기에서는 가타 부타나 호불호를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이 세계를 왜곡하는 것이 될 수가 있다.
공자가 여욕무언(予欲無言)을 말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공자는 만년에 자신이 노장의 사상으로 기울었다고 할 수 있을까? 평생을 주유천하하면서 언어적 소통과 설득의 과정을 보여준 공자가 언어가 갖는 근본적 한계를 인정할 수 밖에 없음을 말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여욕무언은 유불도가 만날 수 있는 공통의 정신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은 말일 것이다. 공자의 말 한 마디를 가지고 이런 추론을 한다는 것이 비약이 될 수도 있지만, 후대의 많은 학자들이 이 말을 가지고 말을 많이 했다는 이유를 들어 나도 한 마디 거들었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