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감정
오래 전 대학 다닐 때 아주 신기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독일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김정양 선생님에게 학생들 몇 명이 니체를 배운 적이 있었다. 이 분은 직분은 목사인데 여러가지로 다재 다능하신 분이었다. 독일 정부에서 한국인으로는 가장 높은 공직자를 역임했고, 그 때 대부분이 모르던 시기에 컴퓨터를 공부해서 연대 경영학과 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도 했다. 음악에 대한 이 분의 조예는 아마추어 수준을 훨씬 뛰어 넘었다. 독일에서 공부를 할 때 하루에 12시간 씩 피아노를 친 적이 있었고, 나중에는 조그마한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기도 했다. 이 분 덕분에 국립발레단이 연대에서 <지젤> 공연을 가진 적도 있다. 이 분이 발레단의 고 임성남 단장과 절친이셨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번은 한 해가 넘어가기 직전에 사당동에 있는 이분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 때 임성남 단장에게서 전화가 와서 함께 망년회를 보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이 분은 국립 발레단 단목을 자처할 만큼 발레단원들에게도 신망이 높았다. 우리는 바로 그 분의 차를 타고 강남의 어느 무용 학원으로 갔다. 학원에 딱 들어서는 순간 대형의 플로어와 커다란 거울이 인상적이고, 그 안에 무대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발레리나들이 우리 일행을 환영해주었다. 그날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 발레리나들의 화려한 춤도 보고 그녀들과 함께 블루스도 치고 하면서 꿈 같은 망년회를 보낸 적이 있다. 무대 위에서 볼 때는 발레리나들이 굉장히 볼륨도 있고 아름다워 보였는데 막상 껴안고 춤을 추는데 뼈가 앙상할 만큼 너무나 가냘프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다 우리 선생님 덕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45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말이 있다. 이름을 대면 알법한 여성 안무가가 주변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썰을 푸는 데 보통이 아니다. 발레단원들을 데리고 고고장에 가서 완전 쓸어버린 이야기 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었다. 그 때 이분이 자신은 절대 피아노를 배울 수 없다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왜 그러냐니까 자기가 듣는 피아노 곡들은 하이 퀄리티인데 막상 자신이 건반을 두들기면 너무나 듣기 좋지 않은 음만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듣는 음과 직접 내는 음 사이의 현격한 차이로 인해 피아노를 배울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이런 경험은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듣는 것과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의 차이는 얼마든지 날 수가 있다.
이런 논리는 글쓰기에도 똑 같이 적용된다. 평소 책을 좋아 하는 사람이라면 그동안 많이 읽어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지를 변별하는 안목은 갖고 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글을 써보려고 하면 첫 운을 떼는 것도 힘들고 막상 쓰더라도 기대와는 너무나 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쓰기 어려워하는 것은 이런 차이 때문이다. 자신의 글의 현재 상태에 대한 부끄러움과 절망 혹은 두려움을 참아내는 것이 정말로 쉽지가 않다. 기형도가 '빈집'이란 시에서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라는 구절은 아마도 그런 감정을 잘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원고지의 빈 칸을 하나 하나 채워나가는 것이나 혹은 깜빡 거리는 커서를 하나씩 채울 때 느끼는 감정은 공포나 다름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애써 고민하느니 시도조차 안 하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그렇 현실적으로 대면하는 감정들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다. 전사(militant)들이 싸움터에서 두려움을 넘어서는 용기를 갖추어야 하는 것처럼, 글을 쓰는 사람들도 타인의 시선에서 오는 두려움과 자기 스스로 느끼는 부끄러움을 넘어서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글은 사실 부끄러움과 용기라는 두 가지 감정에서 길어 올린 것일지 모른다. 자신의 글에 대한 부끄러움을 많이 느낄 수록 생각이 깊어지고 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이런 고민과 성찰만이 좋은 글을 만들 수 있는 동력이다. 하지만 부끄러움에 갇혀 버리면 결코 글을 쓸 수가 없다. 그 굴레를 벗어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내서 부끄러움을 벗어나면 그 다음에는 그 과정이 훨씬 쉬워진다. 그것이 지나쳐서 만용을 부리다 보면 글이 천박해질 수 있다. 그것을 잡아주는 것이 부끄러움일 수 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좋은 글은 부끄러움과 용기 사이에 밸런스를 맞추는 과정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