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를 보면 동서양 인간들의 사유의 차이가 심리학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동양인은 자기 주변 사람들이 행복하거나 불행하면 자신도 행복하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서양인들은 자신의 행복이 결코 주변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동양인들은 전체론적 사고에 익숙하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결코 독립적이거나 고립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인간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지 결코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지만, 동양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족과 공동체 사회와 국가 안에서 삶이 이루어진다. 반면 개체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서양인들은 사회 이전에 반드시 나라고 하는 개인이 우선한다고 생각한다. 사회나 국가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2차적 관계일 뿐이다. 동양인들은 인간들만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사 자체가 그런 연관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자연관을 잘 보여주는 것이 주역이다. 주역은 만물이 타자 존재와 관계를 맺고, 이 타자 존재와의 연관 속에서 어떻게 그 지위와 관계가 결정되는 지를 보여 준다. 반면 인구어의 핵심 구조인 주어-술어 문장을 보면 주어는 항상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존재하고, 다른 존재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이 주어 존재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제1 실체이고 개별자이다. 개별자들을 이어주는 보편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이 개별자에 끄달려 있다. 이 두 가지 사유방식은 전체가 우선인 전체론적(Holism) 입장과 개체가 우선인 개체론(Individualism)으로 나뉜다.
전체론적 사고를 하는 동양인들은 어떤 사건을 결코 고립적으로 보지 않는다. 이런 인식은 ‘새옹지마’라는 고사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집안에 말이 한 마리 걸어 들어왔다. 이웃집 사람이 그것을 보고 축하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 집주인은 축하할 일인지 두고 보자고 말한다. 그 말을 그 집 아들이 열심히 타다가 낙마를 해서 다리가 부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이웃 사람이 안타깝다고 위로를 한다. 그러자 주인이 정말 그런 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서 마을의 다른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끌려가서 죽거나 다쳤다. 반면 다리가 부러진 그 집 아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아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 고사를 보면 행-불행은 어떤 고정된 사건이 아니라 다른 사건들과 연관돼서 끊임없이 달라진다. 결고 고정되거나 고립된 것이 아니며, 그것 자체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의미다.
반면 개체론적 사고를 하는 서양인들은 각각의 사건들은 다른 사건들과 무관한 고립적 사건들로 받아들인다. 나에게 공짜로 무언가 생긴 사건과 그로 인해 일어난 다른 사건 간에는 아무런 관계, 더구나 필연성이 없다. 말이 집에 들어온 사건과 말을 타다가 다리가 부러진 사건은 전혀 별개의 사건일 뿐이다. 실제로 말을 타지 않을 수도 있고, 말을 타도 다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두 개의 사건을 하나의 관계 속에서 생각할 필연적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맥락에서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인 D. Hume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인과성 자체를 부인하기도 한다. 두 사건 사이의 연관성은 반복적 경험에 따른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연상(association) 일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객관적인 물리 법칙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연결되는 주관적인 심리 법칙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것을 고립적이고 개별적으로 보는 서양인들의 일반적 경험이 극단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간단한 예만 들었지만 동서양인들 간의 생각의 차이는 같은 인간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다시 예를 들어보자. 주소를 쓸 때 한국인들은 먼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적은 다음 자신들이 사는 지방과 도시, 그리고 구와 동으로 이어진 다음 비로소 사는 집 주소를 적고, 자신의 이름은 맨 끝에 적는다. 반면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적고 국가는 맨 나중에 적는다. 무엇보다 개인 자신이 우선이고, 사회나 국가는 가장 후속적으로 간주된다. 전자를 공동체주의나 국가주의로 본다면, 후자는 개인주의이고 개체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사유 방식에서도 큰 차이를 야기한다. 대상을 독립적이고 개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분석적 (analytic) 사고가 요구되는데, 이러한 사고는 대상을 그것을 이루는 최소한의 단위로 쪼개는 사고이다. 그 결과 등장하는 것이 더 이상 나뉘어지지 않는 개별자(in-dividual)이다. 대상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수학의 추상적 사고는 이러한 전통에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동양에서는 사물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종합적(synthetic) 사고가 일반적이다. 여기서는 사물을 분리하고 분해하기 보다는 전체 대상과의 연관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고는 분석적 사유의 추상화 보다는 직관적이고 경험적인 사고, 혹은 미적 대상을 받아들일 때의 미학적 추론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사고의 차이가 벌어졌을까? <중국 철학사>를 쓴 중국 철학사가 인 풍우란은 중국인들의 사유구조와 그리스인들의 사유구조의 차이를 토지 중심의 농업 사회인 중국과 해양 무역 중심인 상업 국가의 차이에서 보았다. 농사는 혼자서 지을 수 없기 때문에 가족이나 공동체의 연대와 협력이 중요하고, 또 사시사철 계절의 변화가 농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만물에 대한 변화의 관점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반면 장사꾼들은 대부분 개인 중심으로 상행위가 이루어지고, 계절의 변화와 같은 외부적 요인보다는 거래의 시작에서 최종적으로 수익을 내기 까지를 관장하는 개인의 역량을 중시한다. 이처럼 생존 환경과 생존 방식의 차이가 생각의 차이를 야기한 원초적 이유라 할 수 있다. 물론 동서양 간의 이런 차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서양인들의 사고에서도 변화와 운동을 중시하는 변증법이 존재하고, 동양인들의 사유에서도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장자의 사상이 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동-서양 간의 차이는 대체적인 흐름을 기술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