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제망매가」 각 연 분석

by 이종철


2.1 「제망매가」와 양주동의 해석

필자는 앞서 말한 몇 가지 해석을 고려하면서 「제망매가」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 보고자 한다. 먼저 「제망매가」를 인용해 보자. 해석을 위해 편의상 5 연으로 나누어 보았다. (주: 기존의 해석들은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함으로써 3연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5연으로 해석하는 근거는 “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나) 죽음의 우발성->다) 죽음의 필연성->라) 사후세계에 대한 무지->마) 윤리적인 삶의 기대 라는 식으로 각 연이 독립적이고, 연이 진행되면서 죽음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고 있음을 고려한 데 있다.”) 이렇게 나눌 경우 기존의 3연보다 작자의 생각의 흐름을 더 잘 반영할 수 있다.


가) 죽고 사는 길이 예 있으며 두려운데(生死路隱 此矣有阿米次肹伊遣)

나)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하고 가버렸느냐(吾隱去內如辭叱都 )

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리저리 떨어질 이파리처럼(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라) 같은 가지에 났어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一等隱枝良出古 去奴隱處毛冬乎丁)

마) 아, 극락세계에서 만날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阿也 彌陀刹良逢乎吾道修良待是古如


누이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썼다고 하는 것을 감안해도 이 작품은 단순히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종교인이 종교의 차원에서 승화를 시켰다고 보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 있다. 필자는 오히려 이 작품 속에서 종교, 보다 구체적으로는 불교의 핵심 원리가 부정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수행을 많이 한 도인이나 신앙심이 깊은 종교인이라고 한다면 삶의 무상함과 유한한 생명 등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월명은 누이의 죽음을 대하면서 오히려 생사의 문제가 두렵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은 일반적 종교의 차원을 벗어나 ‘죽음에 대한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두려움’을 제시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러한 두려움을 드러냈다고 해서 월명을 수행이 낮은 승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월명은 죽음을 형식적이고 의례적으로 이해하는 종교적 차원보다 더 깊게 실존적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할 것이다. 생명을 가진 유한자에게 죽음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 한계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죽음은 유한자의 삶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두려운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죽음에 대한 공포야말로 쾌락의 장애물이라 생각해서 그것이 무의미함을 논증하기도 했다.

2.2. 次肹伊遣을 둘러싼 해석들

먼저 이 연의 해석과 관련해 논란이 많은 ‘次肹伊遣’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次肹伊遣’에 대해서는 국어학적 차원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오히려 시적 화자의 내적 심상을 파악하는 열쇠로 볼 때 그 의미가 정확히 이해될 수 있다. 제망매가를 처음으로 해석한 양주동은 ‘次肹伊遣’을 ‘두려운데’로, 김완진은 ‘머믓거리고’로 각기 다르게 해석했다. 김완진의 해석을 두고 신영명은 ‘해독상의 한 진전’이라고 치켜세웠다. 이러한 해석은 언어학적 원리와 문학적 주제 모두 고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적 화자(話者)의 상황과 감정 흐름의 맥락에서 본다면 머뭇거린다는 표현보다는 두렵다는 표현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머뭇거린다는 것은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처럼 선택의 여지와 의지의 동요가 있다. 반면 죽음은 불가항력적이어서 자살과 같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머뭇거리는 식으로 선택할 여지가 없다. 나)연에서 ‘간다는 말도 못다 하고 가버렸느냐’라는 표현에서 보듯, 누이의 죽음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머뭇거린다고 할 수 있을까? 신영명의 ‘해독상의 한 진전’이란 표현은 이런 내용상의 미묘한 점을 놓치고 있다 할 것이다. 더 나아가 강길운과 양희철은 언어학적 원리를 고려해서 ‘버글이고’로 읽고, ‘버글이고’의 의미를 ‘다음이고’ 혹은 ‘차치하고’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 역시 시적 내용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죽음을 ‘두렵다’고 한 실존적 고백은 나)연 뿐 아니라 라)연의 “같은 가지에 났어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라는 고백을 통해 훨씬 강화될 수 있다. 길을 떠날 때도 행선지가 분명하면 앞으로 닥칠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는 곳을 모른다고 하면 실제로 위험지수가 높아질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불안 감정도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次肹伊遣’은 시적 화자의 황망하고 두려운 감정을 담는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수 있다. 오래전 일본인이 신라의 향가를 처음 해석했다는 사실에 분노해 향가 해석에 뛰어든 영문학자 양주동은 「제망매가」의 해석에서 보듯, 단순한 직역 이상으로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적 정신을 잘 드러내서 번역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연의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는 사후세계와 윤회를 강조하는 불교의 기본 정신하고도 배치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만일 윤회를 부정하게 되면 인과응보도 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교의 핵심 원리와 더욱 멀어질 수 있다. 물론 월명이 윤회를 부정했다고 하는 것은 너무 나간 해석이다. 다만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관에서 당연시하고 있는 원리를 의문시했다는 것을 통해 강한 확신이 흔들렸다고 하는 정도로는 충분히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태도는 죽음 앞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실존적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죽음‘을 ‘두려움’과 연결 짓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이별이나 죽음과 같은 표현은 많은 시들에서 슬픔과 두려움을 표현하기 위해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해석들은 이 ‘두려움’의 감정을 너무 쉽게 놓치고 있다. 아마도 「제망매가」를 천도제에서 지었다는 이유로 추선과 수도로 읽고자 하는 선입견이 앞서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불교는 생사의 초탈을 궁극 목적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설령 죽고 사는 길이 널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를 표현할 수 있다.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흔들리지 않는 용기는 플라톤의 <파이돈>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사형을 안타까워하는 많은 제자들과 친구들이 앞장서서 그를 탈옥시키려 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다는 식으로 행동한다. 오히려 그는 죽음 이후의 유토피아의 세계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고 그를 탈옥시키려는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하지만 뒷장에서 보겠지만 소크라테스의 이런 확신은 그릇된 신념에서 나온 것일 뿐 아무런 근거가 없다. 마찬가지로 죽음을 초개와 같이 생각하는 영웅적인 죽음도 있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면 ‘죽음에 대한 선구적 결단’이라고 할 이러한 죽음은 일반인들이 느끼는 죽음 앞에서의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용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세계가 붕괴될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의 맹장 아킬레스가 자신의 친구를 죽였다고 분노하면서 트로이 왕국의 영웅 헥토르에게 결투를 청했을 때 헥토르는 아킬레스가 자신이 상대하기에 버거운 두려운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이 결투를 말렸지만 헥토르는 기꺼이 결투를 벌이면서 최후의 죽음을 맞이한다. 비록 죽음이 사랑하는 가족이나 지인들과 헤어지는 슬프고 두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대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헥토르는 기꺼이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태도는 자신의 신념이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경우에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수도와 추선을 강조하는 기왕의 해석들은 월명이 출가한 승려이고 이 시는 죽은 누이에 대한 천도제의 형식으로 지은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다 보니 ‘두려움’의 감정에 주목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들은 초탈에 대한 의지가 강한 불교 때문에 ‘두려움’이라는 내적 정신보다는 ‘머뭇거리고’나 ‘버글이고’와 같이 언어학적 해석으로 기운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월명이 대하는 죽음은 그런 형태의 죽음과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죽음을 대하는 월명의 태도는 ‘머뭇거림’이 아니라 ‘두려움’에 훨씬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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