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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Jul 27. 2024

수운 최제우 선생 생가 방문기


수운 최 제우 선생의 생가를 방문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오고 싶었지만 시간이 나지 않다가 이번 경상도 여행길에 들러 보기로 한 것이다. 전날 일광 신도시에서 하루 숙박을 했다. 경주를 방문할 요량으로 부산이나 송정에서 자지 않고 좀 더 멀리 올라 왔다. 이곳에서 경주에 위치한 선생의 생가까지는 대략 90여 킬로이기 때문에 멀지 않다.



오전 10시 반쯤 숙소에서 나와 근처 일광 해수욕장에 잠시 들렀다. 이틀 동안 차를 몰면서 비를 끌고 다녔는데 오늘은 해가 짱짱해서 폭염 날씨이다. 일광 해수욕장은 기장에 속해 있지만 구 기장을 지나서 포항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이곳은 넓은 모래사장과 동해의 푸른 바다가 아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피서철인 데도 평일이라 그런지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고 해변을 산책하는 사람들만 가끔 눈에 보인다. 나는 10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집단으로 놀고 있는 곳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런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그저 웃통만 벗고 발은 바닷물에 물을 묻히는 정도였다. 워낙 강렬한 햇살이라 이런 자외선에 30분만 노출돼도 피부에 손상을 입을 것 같다. 과거에 그런 경험을 하면서 고통받은 기억이 났다. 바다는 파도도 없이 잔잔해서 그저 무심코 바라만 보아도 좋다. 올해는 벌써 동해를 경험한다.



30여 분 정도 모래 사장에 앉아 있다가 툴툴 털고 다시 차로 돌아왔다. 워낙 햇빛이 강해서 도로변에 세워둔 차가 뜨겁다. 바로 차를 빼서 경주로 방향을 잡았다. 한국의 도로는 곳곳이 잘 연결되어 있어서 운전하기가 어렵지 않다. 최제우 선생 생가를 다시 검색해서 코스를 잡으니 대략 90여 킬로다. 이 정도면 한 시간 반이면 충분히 갈 수 있다. 양산 쪽으로 빠져서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언양을 거쳐 바로 경주로 이어진다. 경주는 거진 10여 년 만에 방문하는 것 같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바로 우측에 있는 휴게소에 들러 간단한 음료를 샀다. 30도를 넘는 날씨가 무엇보다 생수와 냉커피가 필요하다.



이곳에서 최제우 선생 생가까지는 15킬로 정도가 안 된다. 경주 시가로 들어가다가 왼쪽으로 동국대 경주 분교를 지나가다 보면 어느새 선생의 생가로 들어가는 팻말이 보인다. 마침 태풍이 지난간 터라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만 보일 정도로 맑다. 생가 근처는 전형적인 농가라 집들도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높지 않은 산들이 둘러싸고, 녹음이 짙푸른 숲과 나무들, 논에는 벼들이 한 여름의 강한 햇빛을 받고 있다. 이런 곳은 선생이 태어난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평화롭고 안온한 인상을 준다. 이런 시골에 조성된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니 ‘용담 명가 국수’라는 광고가 길가의 전봇대에 붙어 있는 모습이 보여서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서행으로 계속 가다 보니 용담정 길과 용담 수도원과 용담 교육 수련원 팻말도 보인다. 그곳에서 약간 더 가니 오른쪽으로 '수운 최 제우 선생 생가'라는 팻말이 보인다. 정면에는 높지 않은 산이 한 여름의 녹음으로 치장한 채 무뜩 서있다. 이곳에서 선생의 생가까지는 도로 양쪽 변으로 붉은 꽃을 자랑하는 배롱나무들이 도열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반기는 모습이다.



생가로 들어서니 왼편에 주차장과 관리실이 있다. 한눈에 보이는 주변 풍경이 평화롭다. 평일이라 그런지 차도 별로 없다. 이곳에 차를 세워 두고 천천히 생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무언가 서기(瑞氣)가 느껴진다. 시공을 넘어 대단한 인물을 만날 때 느껴지는 비상한 감정이다. 과거 강진에 위치한 다산 초당을 힘들게 올라갔을 때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 적이 있다. 다산이 1762년에 났다가 1836년에 죽었으니 그래도 12 년 정도는 다산과 수운이 동시대를 산 셈이다. 수운이 뒤 세대의 사람이라 나중에 공부를 할 때 다산의 책을 읽었을지 모른다. 이 시기는 구한말 조선이 마지막 개혁을 시도하다가 좌절을 하면서 더욱 위기에 접어든 시기다. 서구의 제국 주의자들은 중국에서 ‘아편전쟁’을 일으키며 종이호랑이 중국을 약탈했다. 일본의 에도 막부는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강제로 ‘미일 화친 조약’을 맺으면서 나라의 문을 열었다. 중국이나 일본 모두 그동안 살아왔던 자신들의 세계관이 강한 외부의 세력에 의해 무너지는 충격과 위기를 몸소 체험하던 시기였다. 조선의 식자들도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동아시아를 넘어서 서양의 과학 기술과 문명을 조금씩 알아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조선은 그런 것들에 모르새였다. 19세기 조선은 봉건 왕조와 양반 세도 정치가 백성들을 유린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는 데만 급급했다. 그들은 주자학의 이념이 퇴색하고 있지만 서구의 천주교의 새로운 이념에 대해서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에서 다산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1866년 병인양요 때  ‘절두산 순교 참사’와 ‘해미 읍성 집단 생매장’ 사건들이 대표적인데, 이를 전후해 대원군의 조선은 쇄국으로 일관해 더욱 외부세계에 대해 문을 닫았다. 삼정 문란으로 대변되는 조선의 19세기는 약탈에 저항하는 백성들의 민란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서북지방을 배경으로 1811년에서 1812년에 일어난 홍 경래 난이 있었다. 이후에도 민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지만 1862년에 일어난 진주 민란도 대표적이다. 조선 후기에 빈발한 이런 민란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조선의 통치가 지닌 구조적인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동학이 일으킨 민란도 이런 맥락에서 발생했다.



수운 선생을 생각할 때 이런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선생의 생가는 동학을 따르는 수많은 백성들의 함성을 역사의 기억 저편으로 돌린 듯 조용할 뿐이다. 내가 이곳으로 오기까지 수도 없이 수운 선생에게 던진 질문들이 있다. 선생은 무너진 백성의 마음과 원혼을 달래주었던 종교 지도자인가, 아니면 서학에 대별되는 동학이란 이름이 상징하듯 서세 동점의 시기에 무너진 조선을 혁신하고 서학과 대결하려는 혁명가인가, 아니면 오랜 성리학의 이념에 압제되어 왔던 백성들에게 ‘인간이 곧 사람’(인내천)이고, 이 ’인간을 하늘처럼 섬겨라’(시천주)를 깨우친 사상가가 수운 선생의 본래 모습인가, 과연 종교 운동으로서의 동학이 그 시대에 역할을 제대로 했는가, 종교로서의 동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이념이 무엇인가 등등 내 머릿속에는 선생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들이 샘솟듯 일어났다. 선생은 19세기 조선의 학정으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참담한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했다. 그가 시골 농촌의 조용한 곳에서 깨우친 것은 단순히 개인의 면벽 수련의 결과가 아니라 당대 조선의 현실과 서구의 침탈, 백성들의 원성들이 집약돼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수행승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때문에 선생이 깨달은 것은 사상이고 종교와 세계관의 혁명 등이 중첩된 결과이며, 선생의 모습도 그 어느 하나로 한정 지을 수 없을 것이다. 선생은 문체 반정을 일으킨 연암 박지원 못지않은 스타일리스트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동학의 대표적인 가사집 ‘용담유사’를 백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언문으로 천대받던 한글로 지었다. 이것 하나 만으로 수운 선생은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의 정신과 바로 연결되는 것이다. 당대의 백성의 고통을 이야기한 다산 정약용의 ‘애절양’이란 시를 읽다 보면 그 참혹한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조선의 약탈적 세정은 죽은 사람에게도 세금을 걷고, 태어나지도 않은 뱃속의 아기에도 세금을 건 백골징포로 악명이 놓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데 그 인간을 오로지 약탈의 수단으로만 삼은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끊어버린 지아비의 양물을 들고 관청 앞에서 통곡하는 여인의 모습이 이 시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가 오로지 사대부 층만 볼 수 있는 한문으로 쓰여진 것이다. 만일 이 시가 한글로 쓰여 온 백성들이 보았다면 민란이 일어났을 만한데, 이 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단 몇 프로의 식자층뿐이다. 나는 이것이 다산의 씻을 수 없는 한계라고 본다. 그의 시는 다산 개인의 통분을 표현했을 뿐이지 진정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위치에서 함께 생각한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는 조선의 뛰어난 대 학자인 퇴계와 율곡도 마찬가지이다. 왜 그들이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뜻을 몰랐는지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성리학을 통치의 이념으로 삼고 조선을 소중화로 자처하는 한문 숭배주의로 무장한 시대에 한글로 자기 사상을 펼치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 조선의 통치 이념을 공고히 하려는 적극적 행동을 보여 주었을 뿐이다. 반면 수운 선생은 성리학에 가려졌던 인간을 그 중심에 세우고 그들의 생각과 삶을 함께 표현하면서 세상을 개혁하려 했던 최초의 인문이라 할 수 있다.수운의 이런 인간 중심의 세계관은 서양의 근대의 사상에 버금가는 것이다. 아울러 라틴어를 벗어나 모국어를 통해 문체 혁명을 일으켰던 서구의 사상가들처럼 수운 선생은 일찍부터 한글에 주목해서 한글 가사집을 만들어 유포시킨 인물이다. 수운 선생이 다산처럼 학문이 넓고 깊지는 못했어도 선생이 일으킨 혁명적 영향은 그에 못지않을 것이다.



드디어 짙은 녹색의 숲을 배경으로 있는 선생의 생가와 그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보이고, 그 왼편에는 선생의 생가에 관한 안내 표지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생가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문제다. 내가 이제는 지팡이를 짚고 있어서 하체가 너무 약해져서 혼자 돌계단을 오르기가 쉽지 않다. 잘못 넘어지면 부상이 치명적일 수도 있다. 잠시 생각했다. 그냥 여기서 선생을 그리고 추모하는 것으로 끝낼 것인지 아니면 기어 서라도 올라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체면 불고하고 엄금 엉금 기어서 올라갔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이곳에서 만난 관리인하고 나눌 때 다시 할 것이다. 계단 위로 오르니까 오른쪽에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탑과 정면으로 생가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그곳을 넘어서면 비로소 선생이 머물고 공부했다는 생가가 보인다. 물론 오래전 선생의 생가는 붙다 없어지고 후대에 다시 조성한 건물이다. 정면에 보이는 사랑채는 방이 3개인데 그중 하나에 사대 관모를 쓰고 눈이 부리 부리한 선생의 영정과 자그마한 책상이 보인다. 이곳에 잠시 서서 선생의 행적을 기억해 보았다. 선생의 깨침이 그대로 나에게도 느껴지고, 선생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론하던 모습도 보이고, 선생을 따르는 백성들의 함성도 들리는 듯하다. 그렇게 한참을 그 옆 돌계단에 앉아 생각했다. 그늘진 곳이라 바람도 불어서 시원하다. 파란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들이 솜사탕처럼 떠다닌다. 짙은 녹색의 숲이 울창하다. 이런 모습은 200년 전과 별로 다르지 않을 터인데, 어떻게 선생 같은 혁명가가 이 조용한곳에서 탄생할 수 있었을까? 인간을 공간적으로 한정된 존재로만 본다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온 세상을 담을 수 있을 만큼 크다. 수운 선생은 그 마음속에 백성의 고통, 조선의 약탈적 정치, 서구의 침략 등을 담은 것이다.



전형적인 사대부 출신의 시골 농가답게 사랑채 뒤로 안채가 있고, 부엌도 있고, 농기구들을 넣은 곳, 뒷간들이 보인다. 그런 곳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옛 생각에 접어들고 있는데 목에다 수건을 두른 젊은 사람이 들어오면서 인사를 한다. 이곳을 관리하기 위해 경주 시청에서 파견된 관리인이다. 서글서글한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계단 이야기를 언급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신체가 멀쩡한 건장한 사람들만이 아니고 고령화 시대에 노약자들도 많은데 그들이 계단을 오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나의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다. 큰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계단 옆으로 난감하나마 만들어주어도 되는 일이다. 과거 내가 영주의 부석사를 오를 때도 너무 높은 계단을 가지고 투덜거런 적이 있었다. 산속의 절에는 누구보다 할머니 노약자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그들을 위해 조금도 배려를 하지 않는다. 불교의 자비심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배려하는 일상적인 실천에 있다는 것을 왜 그들은 이해를 못 할까? 오히려 이런 곳들이 인권에 대한 의식이 낮다. 진정으로 고통받는 인간들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교화의 대상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수운 선생은 누구보다 고통받는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했는데, 만일 수운 선생이 이런 모습을 보면 ‘얼씨구나 잘했다’라고 하실까? 그분도 나의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시청에 건의를 해보겠다고 했다. 나도 나중에 시청 게시판이나 담당자에게 건의를 해보겠다고 했다. 그것 말고도 관리인과 한참을 이야기했다. 올해는 수운 선생 탄신 200주년이 되는 해라 가을 경 대대적인 행사를 이곳에서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행사 말고도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가 천년을 넘어서 살아남으려면 그의 사상을 잘 이해하는 제자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도 최제우 선생의 사상과 이념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학인들을 양성해야 한다. 이곳은 조용해서 공부하기도 얼마나 좋은가? 절에서도 템플 스테이를 통해 일반인들의 수행과 수련을 돕는 데 이곳에도 그런 곳을 만들어 한 달 동안 머물며 공부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어떨 지도 건의를 해보라고 당부를 했다. 관리인이야말로 이곳의 사정을 잘 알고 있고 이곳을 가꾸고 발전시킬 묘책을 얼마든지 낼 수 있는 분이 아닐까? 그분 말로는 근처 2-3킬로뿐이 떨어져 있지 않는 용담정에 그런 곳이 있다고 안내를 해주었다. 이곳을 벗어나서 용담정에도 올라가 보았는데, 그곳은 천도교에서 대대적으로 성지로 구축해 놓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동학은 특정 교단의 종교 이념보다는 한국의 사상과 철학으로 발전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고, 그 길이야말로 동학이 동아시아를 벗어나 세계적인 철학 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한다.



관리인에게 사진을 부탁해서 몇 장 찍고 그의 도움을 받아 돌계단을 내려왔다. 이것도 수운 선생의 따뜻한 배려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을 콘퍼런스 할 때 다시 찾아올 수 있기를 기약하고 관리인과 헤어져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다음 행선지를 검색하고 있는데 관리인이 박카스 한 병을 들고 와 건네준다. 이런 시골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인간미이다. 그와 헤어져서 용담정으로 올라갔다가 바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원두막에서 찐 옥수수를 팔 길래 몇 개 샀다. 인상이 좋은 아낙네가 ‘서비스로 2개 더 넣었어요.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라고 말한다. 역시 사람 냄새가 나는 한국의 시골 풍경이다.




생가 들어가는 길


생가 전면도



유허비


사랑채


수운 선생


앞 전경


장독대



안채 옆 모습



친절한 관리인과 함께


영광되게 수운 선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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