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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Sep 09. 2024

돈오돈수(頓悟頓修)인가 돈오점수(頓悟漸修)인가?


지눌에 대한 성철의 비판은 문중 간의 싸움까지 일어날 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 시대 선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해 20세기의 대표적인 선사 성철은 돈오 이후에 점수가 필요 없다. 돈오돈수(頓悟頓修) 일뿐이라고 비판했다. 한 번 깨달은 후에는 따로 오랜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점수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고, 점수를 요한다면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사무라이 같은 선사인 성철의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고, 그이의 취지를 모를 바는 아니다. 지눌은 오래전 사람이라 성철의 이 같은 비판에 대해 따로 항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대신 문중 간에 논쟁이 붙었고, 덕분에 학자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았다. 때문에 돈오냐 돈수냐는 한국의 선불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이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이다. 닭이 있어야 달걀을 낳을 수가 있다는 말도 설득력이 있고, 달걀이 있어야 그 달걀에서 닭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라는 말도 설득력이 있다. 한 마디로 이것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변증론에서 제시한 '안티노미'(Antinomie) 이론과도 같다. 칸트가 4가지 형식으로 제공한 변증론은 이를테면 "세계는 시초가 있다,"라는 명제도 옳고 "세계는 시초가 없다."라는 명제도 옳다는 형태이다. 형식 논리적으로 판단할 때 옳으면 옳고 틀리면 틀리다는 것처럼 서로 모순적인 명제가 동시에 옳을 수는 없다. 그런데 안티노미의 핵심 요지는 둘 다 옳을 수가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이러한 명제들은 경험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경험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돈오가 옳으니 돈수가 옳으니 하는 논쟁도 경험적으로 쉽게 확증을 할 수가 없을 수 있다. 체험을 한 자만이 알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상자 속의 딱정벌레'의 딜레마에 걸린다. 깨달은 자가 딱정벌레를 가졌다고 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단이 없다. 때문에 이런 문제는 백날을 따져 보아야 해결이 난망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 서는 것이 속 편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문제를 보는 방식을 바꾼다면 얼마든지 공존이 가능하고, 보는 방식에 따라 상대의 주장이 틀리거나 맞을 수도 있고, 내 주장이 틀리거나 맞을 수도 있다. 문제는 어떻게 보느냐에 있지 선택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돈수는 깨달음의 문제를 존재론적으로 보는 것이고, 점수는 인식론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보자. 존재론적으로 볼 때 깨달음의 본질이나 본체가 있고, 그것을 경험한 것을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그것이 존재하고 또 확연하게 본 사람의 입장에서 점수를 주장할 이유가 전혀 없다. 물론 이 경우에도 무엇이 본질이고 본체인가라는 점에 대해 인식론적 논쟁이 있을 수는 있다. 이런 논쟁을 인정한다면 노자가 말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고도 주장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존재론적 가정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반면 점수를 인식론적인 개명이자 확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하나의 깨달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다음 단계의 깨달음이 이어질 수가 있다.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했듯,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점수는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려는 자의 알을 깨는 행위와도 같다. 이런 경험은 인식의 지평이 달라지는 경험이고, 확장되는 경험이다. 때문에 여기서는 점수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존재론적인 문제를 인식론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 문제가 풀기가 힘들다. 문제의 해결은 문제의 성격을 분명히 할 때 비로소 해결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혼동한다면 마치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이야기를 했듯, 숫 염소의 젖을 짜려고 할 때 그 밑에 양동이를 대는 것과 같다. 숫염소의 젖을 짠다는 행위기 괴이한데 또 그 밑에 젖을 받겠다고 양동이를 대는 것도 괴이한 것이다. 만일 돈오와 돈수를 존재론적인 문제와 인식론적인 문제로 이해한다면, 서로 간에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의 논쟁이 무의미해질 수 있다. 사람들은 선사들의 말을 너무 절대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도 인간인데 절대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것이다. 그들도 얼마든지 잘못 볼 수가 있고, 잘못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의 이런 견해를 확장해 보면 기독교의 경우에서도 끊임없이 논쟁이 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적용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있고 이 땅에서 그것을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 있는 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을 넘어선 초월의 세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 있다. 사실 이런 논쟁도 앞서의 논쟁들처럼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다. 당신은 저세상의 '하나님의 나라'라를 가보았냐고 묻는다면 누구든 답변을 할 수 없다. 그것은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회피하는 것으로 풀리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것을 인식론의 문제로 가정한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가 있다.


물론 나의 이야기도 하나의 주장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를 보는 방법을 달리 함으로서 문제를 새롭게 인식할 수가 있다. 해결이 난망한 것을 고집한다고 해서 피 터지게 싸운다면 해결되지는 않는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진영논리'도 그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인식 방식을 바꿀 때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고, 해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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