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https://www.yes24.com/product/goods/144193529)는 1970년 대에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는 격동의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과거의 나의 삶을 반성도 하고 또 힐링도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1970년대 중반에 대학을 들어가면서 경험한 충격적 사건이 둘 있다. 하나는 대학 입학시험을 볼 때 신체검사에서 탈락한 사건이고, 두 번째는 유신 독재를 경험한 사건이다.
당시 Y대는 면접시험에서 지체부자유 학생 14명을 수학 능력 부족으로 대거 탈락을 시켰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게는 신체검사를 받을 당시의 상황이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나는 소아마비를 앓은 내 다리 때문에 중학교 이후부터는 공중목욕탕 한 번 가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팬티만 입은 나를 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인턴 레지던트까지 포함해 7-8명이 해부대 위의 개구리처럼 나의 벌거벗은 몸을 뒤적거렸다. 살면서 그런 치욕은 처음이었다. 내 옆에서 함께 검사를 받던 치의예과 생은 엉엉 울기까지 했다. 그런 검사를 받고서 우리들 14명은 2차 시험 응시 기간을 넘긴 상태에서 탈락했다. Y대는 피해 학생들이 후기 대학을 볼 기회조차 박탈해 버린 것이다. 당시 학생들과 부모들은 너무나 억울해서 워커힐 위에 있던 정립회관에서 단식 투쟁을 했다. 그런 장면을 본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직접 전화를 걸어 입학시키라고 해서 정원 외 입학을 했다. 당시 Y대는 사건의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추가로 정원 외 입학생 14명을 받아 오히려 수익을 얻은 셈이 됐다. 대학은 정원 외로 입학한 지체 부자유 학생들의 수학을 돕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런 사건을 그냥 야만의 시대 탓으로 넘기기에는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다. 내년이면 그 사건이 벌어진지 50 주년이 되는데, 솔직히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고 싶어 했던 것처럼 Y대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고 싶은 심정이다. 현재 이 문제를 공론화할 것인지 고민 중이다.
두 번째는 대학 입학의 은인이라고 할 대통령 박정희가 장기 유신 독재를 이끌어온 독재자였다는 점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당시에는 대학가조차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제한을 받았고, 자유로운 학문과 사상 탐구도 통제를 받아 마음대로 책도 보지 못했다. 대학가에는 늘 짭새들이 상주하면서 학생들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벤치에서조차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간혹 술자리에서 울분에 겨워 독재자와 독재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긴급 조치 위반으로 끌려가서 심하면 징역살이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가 있었던 남산은 오늘날과 같은 낭만적 분위기와 달리 살벌한 곳이었다. 대학가 분위기는 오히려 광주 사태를 경험한 80년대가 더 자유로왔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당시 대학생들은 공부를 하거나 술 마시고 당구 치는 등 노는 일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사회 비판에 일찍 눈뜬 극 소수의 학생들만 언더에서 은밀하게 이데올로기 학습을 하면서 야학을 하고 학생 운동을 도모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운동권 학생은 아니었지만 법대생으로서 고시 공부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고시는 유신 독재에 투항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는 입학 당시의 나쁜 경험으로 인해 주어진 길을 결코 순응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아무튼 이 두 가지 사건은 1970년대 나의 대학 생활 기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첫 번째 사건 탓인지 소아마비 걸린 다리를 더는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공중목욕탕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나들었다. 두 번째 사건은 1980년 광주 사태가 벌어졌을 때 1980년 6월 27일 명동에서 친구와 둘이서 데모를 벌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나의 인생의 행로 자체가 바뀌고, 법대생이 철학도로 변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내용의 일부가 <그대에게 가는 먼 길>에도 실려 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 당시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게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물론 지금은 더 이상 그로 인한 상처는 없다. 하지만 Y대의 사과는 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