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세월

by 이종철

신의 아그네스>의 배우 윤석화가 향년 69세로 하늘 나라로 가셨다. 나와 같은 나이다. 이제 동시대를 살던 연예계 스타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가는 모습을 보니 죽음이 나와 멀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지난 주 모임에서 뵌 한 선배는 말끝마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90살까지 현장에서 뛰겠다고 자주 선언을 하는데 내가 이상한 걸까?


“세상 참 무섭게 변한다. 그지?”


운전대를 잡은 경석이 무의대교의 매끄러운 아스팔트 위를 달리며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조수석에 앉은 종성은 창밖으로 펼쳐진 푸른 서해를 가만히 응시했다. 예전 같았으면 잠진도 선착장에서 배 시간에 맞춰 줄을 서고,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던져주며 족히 한 시간은 걸려야 닿을 수 있었던 무의도였다. 이제는 육지와 섬을 잇는 거대한 은빛 다리가 그 모든 기다림의 미학을 효율성으로 바꿔놓았다.

무의대교.png

“그러게. 그때는 배 끊길까 봐 시계 보면서 소주 한 잔 마시는 것도 조마조마했었는데. 이제는 그냥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슥 들어오니 섬에 간다는 실감이 덜하긴 해.”


뒷좌석에서 창문을 살짝 내린 명호가 덧붙였다. 차는 이미 복잡한 용유도의 을왕리와 왕산 해변을 지나쳐온 상태였다. 화려한 간판과 호객 행위, 인파로 북적이는 용유도의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무의도로 들어서자, 공기의 결부터가 한층 차분해졌다. 세 친구는 다리를 건너며 익숙한 듯 낯선 섬의 품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해안가 끝자락, 파도 소리가 마당까지 들려오는 작은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는 고민할 것도 없이 해물 칼국수였다. 커다란 양은 냄비 가득 백합과 홍합, 가리비가 산더미처럼 쌓여 나왔고, 그 틈 사이로 뽀얀 김을 내뿜으며 굵직한 면발이 고개를 내밀었다.


“와, 국물 제대로다. 조개 단맛이 그대로 녹아 있네.”


명호가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갓 담근 아삭한 겉절이를 칼국수 면에 돌돌 말아 입안 가득 넣자, 쫄깃한 식감과 매콤한 양념, 그리고 바다의 풍미가 어우러졌다.


용유도의 식당들이 보여주기식 화려함에 치중한다면, 무의도의 칼국수는 이 섬의 소박한 풍경을 닮아 있었다. 세 친구는 특별한 대화 없이 한동안 면치기 소리와 조개껍데기 고르는 소리만 식탁을 채웠다. 바다를 곁에 두고 먹는 칼국수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지난 일주일간 쌓인 일상의 먼지를 씻어내 주는 보약 같았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근처 해안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카페로 향했다. 통유리 너머로 만조가 된 서해가 은빛 비늘을 파르르 떨며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따뜻한 차 한 잔씩을 앞에 두고, 세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삶의 언저리로 흘러갔다.


“요즘 느끼는 건데, 통장에 찍히는 숫자보다 아침에 일어날 때 무릎 안 아픈 게 훨씬 큰 재산이더라고.”


경석의 말에 종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젊을 때는 남들보다 앞서가려고, 더 많이 가지려고 참 애쓰며 살았지. 근데 나이 먹어보니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결국 끝까지 남는 건 내 몸뚱이 하나랑, 이렇게 불러내면 군말 없이 나와줄 친구 몇 명뿐인데.”


“돈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지만, 한 번 무너진 건강이나 금 간 관계는 되돌리기가 힘들지.” 명호가 창밖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덧붙였다.


화려한 성공담이나 거창한 미래 설계는 이제 그들의 대화 주제가 아니었다. 대신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건강하게 오래 걷고, 어떻게 하면 서로의 안부를 더 자주 물으며 이 긴 생의 여정을 함께 완주할 수 있을지에 대한 한적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카페를 나설 때, 해는 어느덧 수평선 너머로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내려앉고 있었다. 다시 차에 올라 무의대교를 건너는 길, 백미러 속의 섬은 멀어지지만 세 사람의 마음속엔 무의도의 고요함이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접근성이 좋아져 가기는 쉬워졌지만, 그 안의 정취는 여전히 변치 않은 무의도처럼, 그들의 우정도 세월의 흐름 속에 더 깊고 단단해지고 있었다.


“야, 다음 달엔 정선 한번 갈까? 거기 공기가 기가 막히거든.” “좋지! 건강 관리 잘하고 있어라들.”


다리 너머 육지의 불빛이 가까워졌지만, 세 친구가 공유한 무의도의 바다 내음은 차 안에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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