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춘국도를 따라 가평으로 향하는 길, 명석은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며칠 전, 대학 시절 신촌 시장 내에 있었던 단골 주점 주인의 부고를 듣고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툭 던진 한마디가 발단이었다. "우리, 더 늦기 전에 한 번 제대로 모여보자."
그 한마디는 각자의 성채에서 고립되어 가던 다섯 친구를 북한강 줄기로 불러모았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마른 나뭇가지들을 보며 명석은 생각했다.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왜 도착한 곳은 항상 안개 속일까.'
가평의 한적한 펜션, 거실의 벽난로 주위로 모인 친구들의 얼굴에는 세월의 훈장이 깊게 패어 있다. 만난지 거진 50년의 세월을 지나다 보니 이제 다들 7순언저리에 걸쳐 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기태였다. 그는 강남의 스카이라인을 바꾼 굴지의 건설사 대표다. "강변북로를 타고 오는데 내가 세운 주상복합 건물들이 보이더군. 나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단단한 콘크리트를 쳤다는 자부심으로 살았어. 그런데 말이야, 정작 내 마음이 기댈 곳 하나 공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군. 입주민들의 민원은 즉각 해결하면서, 내 아내와 아이들이 보내온 고독의 신호는 부실 공사하듯 덮어버렸어."
그 옆에서 차를 마시던 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평생을 내무 행정 법 집행의 최전선에서 보낸 고위 공직자 출신이다. "나 역시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가 잘 돌아가게 만드는 톱니바퀴로 살았네. 청렴과 원칙이 내 훈장이었지. 하지만 퇴임 후 돌아보니, 내가 지킨 건 '법문'이었지 '사람'이 아니었어. 규정대로 처리했다는 안도감이, 정작 도움이 필요했던 누군가의 눈물을 외면하게 만든 건 아닌지… 그 차가운 정의가 이제 와서 나를 춥게 만드네."
이야기의 무게가 깊어질 때쯤, 창백한 안색의 진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는 평생을 서양 철학, 특히 독일 관념론 연구에 바친 노철학자다.
"나는 평생 헤겔의 '절대정신'을 추적하고 Kant의 '정언명령'을 강의했네. 이성적 사유가 우리를 구원할 거라 믿었지. 하지만 요즘은 내가 읽어온 수천 권의 책들, 내가 썼던 수많은 논문들과 책들이 다 허무하게 느껴져. 죽음과 노화, 그리고 이 근원적인 외로움 앞에서는 그 거창한 형이상학적 체계들이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하더군.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날기 시작한다'고 했지만, 정작 내 삶의 황혼에 부엉이는 날지 않고 침묵만 지키고 있어. 내가 가르친 건 삶이 아니라, 삶에 대한 각주뿐이었던 거야."
진우의 눈에는 평생을 바친 학문에 대한 깊은 회의와 배신감이 서려 있었다. 논리적 완결성이 줄 수 없는 생의 비논리적인 슬픔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막내 승우였다. 갤러리를 운영하며 심리학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던 그는 진우의 잔에 술을 채우며 조용히 말했다.
"진우 형, 어쩌면 우리가 느끼는 그 '빈 구멍'은 라캉이 말한 '타자의 욕망' 때문인지도 몰라요. 우리는 평생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묻기보다, 부모가 바라는 아들, 사회가 인정하는 전문가, 자식들이 존경하는 아버지라는 '타자의 시선'이 편집해 놓은 사진첩 속의 주인공이 되려고 애써왔잖아요."
승우는 벽난로의 불꽃을 응시했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남들이 '좋은 삶'이라고 규정한 이미지에 자신을 끼워 맞추며 살아온 거죠. 기태 형의 빌딩도, 정호 형의 명예도, 진우 형의 학문적 성취도… 사실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타자가 우리에게 요구한 숙제였을지도 몰라요. 그 숙제를 다 끝내고 나니, 정작 '나'라는 주체는 텅 비어버린 거죠. 우리가 느끼는 후회는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라기보다, 단 한 번도 '나 자신의 욕망'으로 살아보지 못한 자의 공허함일 거예요."
밤이 깊어갈수록 방 안의 공기는 무거워졌지만, 역설적으로 마음들은 가벼워지고 있었다. 자신의 구멍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순간, 그 구멍은 더 이상 치부가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명석이 창밖의 어둠을 보며 마지막으로 정리하듯 말했다. "결국 좋은 삶이란, 완벽하게 채워진 상태가 아니라 이 빈 구멍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삶이 아닐까 싶네. 성공의 화려한 외피를 벗겨내고 남은 이 초라하고 외로운 진짜 나를, 이제라도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말이야."
다섯 친구는 더 이상 성공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젊은 날 차마 하지 못했던 고백과, 현실에 매몰되어 잃어버렸던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보았다. 가평의 깊은 밤, 그들의 빈 구멍 사이로 차가운 겨울바람 대신 오랜 우정의 온기가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