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한 분이 Vivek교수의 EBS 강의를 듣다가 떠오른 생각을 말한다. "헤겔에 따르면 철학을 행하는 것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반면 헤세(1877-1962)는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왜 헤겔과 헤세가 상호 연관해서 연상이 되었을까? 헤겔과 헤세 모두 우리에게 알려진 철학자이자 작가이지만 이 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나는 이 둘 모두에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용기'(der Mut)라는 감정을 꼽고 싶다. 헤겔은 철학을 공부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전통적 의미에서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sophia)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용기'(der Mut zur Wahrheit)(<정신현상학>)라고 했다. 헤세가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데미안>)고 한 것도 성장이나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기존에 속해 있던 세계를 깰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헤겔과 헤세 모두 진리를 깨닫거나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용기라는 감정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은 용기(courage)를 전사(military man)의 덕목이라고 보았다. 인간을 3분설의 관점에서 본 그는 머리의 덕목은 지성이고, 가슴의 덕목은 용기이며, 욕망을 가리키는 배의 덕목은 절제라고 했다. 일국을 다스리는 통치자에게는 냉철한 지혜와 지성이 요구된다. 반면 나라를 지키는 전사들에게는 무엇보다 의지의 덕목인 용기가 필요하다. 창과 칼이 부딪히고 선혈이 낭자한 전쟁터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겁을 낸다. 아무리 뛰어난 전사라도 이런 감정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비겁한 자와 용기 있는 자의 차이는 전자는 그런 두려움을 무릅쓰고 전쟁에 임하지만, 후자는 그런 두려움 때문에 회피하고 도망가는 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용기라는 감정은 '~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에서 비롯된 것이고, 비겁(cowardice)이라는 감정은 '~ 때문에'(because of)에서 비롯된 것이다. 후자의 감정은 이성적 판단에서 가능한 것이고, 전자의 감정은 윤리적 판단에서 가능하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보자. 밤길에 숲속을 지나던 사마리아인은 어떤 사람이 끙끙 앓는 신음 소리를 듣는다. 그 순간 그는 머리가 쭈뼛 솟는 느낌이 든다. 보니까 그 사람은 강도를 당해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이다. 산을 타본 사람들은 산속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안다. 그런데 부상당한 사람을 보았을 때는 그런 두려움이 훨씬 증폭이 될 수 있다. 저 사람처럼 나 역시 강도들한테 당하지 않을까라는 감정이 들어서 그 자리를 빨리 떠나고 싶어질 것이다. 사실 이런 판단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자기가 도망가면 부상당한 사람은 이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용기라는 감정은 이런 상황에서 요구가 된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오직 저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선한 마음에 그를 돕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런 감정이 도덕적인 감정이고 두려움을 무릅쓰는 전사들의 덕목인 것이다. 이러한 타자를 향한 도덕적 용기는, 역설적으로 자기 내면의 가장 고통스러운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20세기의 뛰어난 정신분석학자인 자끄 라캉은 이런 '용기'의 감정이 다른 누구보다 정신분석가나 혹은 트라우마를 벗어나려는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트라우마는 그 상처가 커서 누구든 그로부터 벗어나고 회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늘 다시 그 고통스러운 감정의 언저리로 되돌아가는 '반복 강박'이 일어나는 것이다(Wo Es war, soll Ich werden/G. Freud) 이 트라우마(Trauma)를 직시하는 데 요구되는 것이 모름지기 '용기'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라캉은 정신분석학이 과거의 위대한 철학의 유산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트라우마는 직시할 용기를 내지 않는 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개인의 인격에서뿐 아니라 불행한 과거사를 정리하려는 사회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우슈비츠 학살을 직시하고 용서를 구했던 독일과 달리 종군 위안부나 난징 살해 사건 등 아시아의 수많은 인민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일본이 여전히 과거사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는 경우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독일은 과거의 악몽으로부터 상당 부분 벗어났지만, 일본은 한국이나 중국 등 주변 국가들하고 작은 문제만 있어도 불행했던 과거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는가?
헤겔과 헤세는 모두 공통적으로 이런 용기라는 의지 혹은 감정이 진리를 깨닫고 새로운 창조를 하는 데 필요하다고 보았다. 용기는 그런 거창한 문제들 말고도 일상에서 언제나 요구되는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익명의 다수의 보이지 않는 침묵 강요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도 대단한 용기라고 할 수 있고, '좋아요'라는 작은 감정 표시도 작지만 의미 있는 용기라 할 수 있다. 진심으로 남을 돕고자 하는 선한 감정을 내는 것도 용기이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도 용기의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단순히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떨림에도 표현할 수 있는 용기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