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送舊迎新)

by 이종철

2025년의 마지막 해가 저물어가는 12월 31일 오후, 눈 덮인 강원도 평창의 가파른 고갯길을 검은색 SUV 한 대가 조심스럽게 오르고 있다. 차 안에는 수십 년간 한 직장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한 네 남자가 타고 있다.


운전대를 잡은 이는 환갑을 넘긴 박 전무(62)였고, 조수석에는 그의 입사 동기인 최 상무(61)가 앉아있다. 뒷좌석에는 이제 막 쉰아홉이 된 김 부장과 이 부장이 창밖 풍경을 응시하고 있다.


"박 전무, 길 미끄러운데 천천히 가자고. 우리 나이에 사고 나면 뼈도 안 붙어."


최 상무가 손잡이를 꼭 잡으며 말했다.


"걱정 말게. 내 QM6가 노익장은 과시해도 눈길에는 장사거든. 그나저나 다들 오랜만이네. 회사 밖에서 이렇게 모이는 게 얼마 만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작년 송년회는 사무실 근처 횟집에서 대충 때웠는데, 이렇게 강원도까지 오니까 진짜 연말 기분이 나네요."


뒷좌석의 이 부장이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김 부장은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확인하며 덧붙였다.


"형님, 여기서 5분만 더 가면 예약한 펜션입니다. 독채라 우리끼리 떠들기 딱 좋을 거예요. 근처에 맛있는 황태해장국 집도 봐뒀습니다."


"황태 좋지. 근데 최 상무, 자네 아까부터 왜 그렇게 한숨이야? 풍경 좋구먼."


"풍경은 무슨. 올해가 가는 게 아쉬워서 그런다, 이 사람아. 내년이면 우리도 이제 정말 '뒷방 늙은이' 소리 들을 텐데."


"에이, 최 선배님. 요즘 육십은 청춘입니다. 저랑 이 차장은 이제 겨우 예순 문턱인데 벌써 기운 빠지는 소리 하시면 안 되죠."


"김 부장 말이 맞아. 자, 도착했다. 일단 짐 풀고 불부터 지피자고!"


박 전무의 외침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숯봉지를 뜯던 김 부장이 문득 장갑을 끼며 입을 뗐다.


"근데 형님들, 여기 오니까 딱 반년 전 그날 생각나지 않습니까? 우리 다 같이 가족들 데리고 속초 해변 갔던 거요."


"말해 뭐해. 그때 우리 집사람들이 더 신나서 난리였잖아. 최 상무네 제수씨랑 우리 집사람이 둘이 손잡고 바닷가 뛰어가던 게 엊그제 같네."


최 상무가 부채질을 멈추고 허허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그때 이 부장이 뙤약볕에서 가족들 다 먹이겠다고 땀 뻘뻘 흘리면서 대게 손질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구먼. 자네 덕분에 우리 다 입이 호강했지."


"아유, 형님. 그때 대게 값보다 박 부장님이 쏘신 물회 값이 더 나왔을걸요? 대포항 그 집 줄이 너무 길어서 우리 뙤약볕에 한 시간 넘게 서 있었잖아요. 기억나세요?"


이 부장의 말에 박 전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기억나지! 그때 최 상무가 '나 환갑 넘어서 이런 줄 서야겠냐'고 투덜대더니, 막상 한 그릇 비우고 나서는 '한 접시 더'를 외쳤잖아. 그게 벌써 반년 전이네. 시간 참 빨라."


"그때 밤바다 보면서 우리끼리 맥주 캔 따던 생각도 납니다. 애들은 불꽃놀이 한다고 뛰어다니고, 우리 넷이서 나란히 모래사장에 앉아 있었는데... 참 평화로웠죠."


김 부장이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다들 집에 두고온 처자식들 한테 미안한 느낌이 든다.


"그러게 말이야. 여름엔 그 뜨거운 모래 위에서 바다를 봤는데, 이제는 이렇게 눈 덮인 산속에서 모닥불을 쬐고 있네. 6개월 사이에 계절도 바뀌고 우리 나이도 한 살 더 먹을 준비를 하고 있고..."


"그 속초 여행이 올 한 해 버티는 데 큰 힘이 됐습니다. 가족들도 다들 그때 얘기를 아직도 해요. 내년에도 그런 기회가 또 오겠죠?"


"당연하지. 자, 일단 이 불꽃 좀 보게. 속초 바다 불꽃놀이만큼이나 예쁘구먼. 자,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 한 해 마무리 좀 해볼까?"


펜션 마당에 마련된 화로에 장작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네 사람은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고구마를 던져 넣은 채 잔을 채웠다.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 독한 소주 한 잔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자, 돌아가면서 올해 제일 힘들었던 일 하나씩만 털어버리자고요. 여기서 다 태워버려야 내년이 가벼울 거 아닙니까? 박 전무님부터 하시죠."


이 부장의 제안에 가장 연장자인 박 전무가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뗐다.


"나는 올해... 사실 몸이 좀 안 좋았어. 봄에 정기검진 받고 재검 나오는데, 덜컥 겁이 나더라고. '아, 나도 이제 끝인가' 싶어서. 애들은 아직 자리도 못 잡았는데 말이야. 다행히 큰 병은 아니었지만, 그때 처음으로 내가 유한한 존재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지. 회사에서 기획서 쓰는 것보다 내 건강 진단서 읽는 게 더 힘들 줄은 몰랐어."


"형님, 고생하셨네요. 저는... 올해 회사에서 새로 도입한 AI 시스템 적응하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밑에 애들은 척척 해내는데, 저는 화면만 보고 있으면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하얘지더라고요. '김 부장님, 그것도 모르세요?' 하는 후배 녀석 눈빛을 봤을 때, 그게 참... 자존심보다 서글픔이 더 컸던 한 해였습니다."


김 부장의 고백에 모두가 숙연해졌습니다. 최 상무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야 뭐, 다들 알다시피 올해 우리 집 큰애가 결혼했잖아. 경사는 경사인데, 뒷바라지하느라 노후 자금으로 모아둔 통장을 헐었지. 그러고 나니 밤에 잠이 안 오더라고. 내년 퇴직인데 이제 뭘 먹고 사나 싶어서. 가장의 무게라는 게 환갑이 넘어도 가벼워지질 않아. 돈 때문에 자식 앞에서 작아지는 내 모습이 올해 가장 아픈 기억이었네."


"다들 참 치열하게 버티셨네요. 저는 올해 투자했던 코인이 반토막 났을 때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코스피에 투자하는 건데 한방을 노리다가 완전 망가졌어요. 아내 몰래 했던 거라 가슴 졸이며 사는데, 연말에 결국 들켰거든요. 한 달 내내 집안 분위기가 냉골이었죠. 돈도 잃고 사람 신뢰도 잃고... 정말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이 부장이 숯가루 묻은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물며 말했습니다.


"내가 평소 하던 말 잊었나? 때리려다가 맞을 수도 있다고. 인생지사 새옹지마지. 너무 상심하지 말게나." 그래도 인생을 조금 더 산 박 전무가 위로의 말을 건넨다.



일배 일배를 거듭하면서 술이 깊어지자 다들 힘이 드는지 깊은 침묵이 감싼다. 밤이 깊어지자 하늘에는 별이 쏟아질듯 박혀 있다. 한 겨울이지만 의외로 날씨가 푸근해서인지 피워놓은 모닥불로도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 네 사람은 다시 잔을 채웠다.


"자, 이제 우울한 얘기는 그만하고! 다가오는 병오년 새해엔 우리에게 어떤 기분 좋은 일이 생길지 한마디씩 해보자고. 이번엔 거꾸로 이 부장부터 해보지 그래."


"저는 내년에 아내랑 다시 연애하는 기분으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잃어버린 돈은 어쩔 수 없지만, 아내 마음은 다시 찾아야죠. 내년 봄에 둘이서 제주도 올레길 완주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리고 내년엔 제발 코인창 안 들여다보고 살 겁니다!"


"하하, 보기 좋네. 나는 내년에 드디어 손주를 본다네! 며느리가 내년 5월이 예정일이라는데, 그거 하나 보고 버티는 중이야. 퇴직하고 나면 손주 녀석 유모차 끌고 공원 산책하는 게 내 2026년 유일한 로망이지. 그때는 회사 일 다 잊고 '할아버지'로만 살고 싶어."


최 상무의 얼굴에 처음으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김 부장이 말을 받았다.


"저는 내년에 회사 공부 말고, 제가 진짜 하고 싶었던 목공을 좀 배워보려고 합니다. AI가 못 만드는, 내 손때 묻은 의자 하나 만들어보는 게 목표예요. 내년 이맘때는 우리가 이 펜션이 아니라 제가 만든 의자에 앉아 있으면 좋겠네요." 그는 그동안 술자리를 피하면서 공방에 열심히 드나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박 전무가 모두를 둘러보며 잔을 높이 들었다.


"나는 내년에 우리 멤버들 모두 아프지 않고, 지금처럼 이렇게 얼굴 볼 수 있는 건강이 허락되길 바라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미뤄뒀던 수필집을 하나 내보고 싶어. 30년 넘게 직장 생활하면서 느꼈던 것들을 글로 정리해보려고. 제목도 정했어. '아직은 뜨거운 겨울'이라고."


"오, 박 작가님! 멋진데요?"


"자, 이제 곧 12시다. 10, 9, 8..."


네 남자의 카운트다운 소리가 강원도의 고요한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0! 새해 복 많이 받게들!"


"2026년 병오년은 우리의 해입니다!"


폭죽 대신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소리가 정겨웠다. 펜션의 밤이 깊어가고 있지만, 이 깊은 밤은 신 새벽을 예비하는 어둠이었다.


갑자기 몇 달 전 죽은 후배 희복의 말이 떠오른다.


"내 이름에 복(復)자가 있는거 몰라요? 지뢰복(地雷復)이라구. 어둠이 가장 강할 때 기죽지 않고 고개를 다시 치켜드는 형국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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