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과장으로 올해는 차장진급을 하나 싶었는데, 김 부장은 P를 불러서 해고를 통보했다. 정말 김 부장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었지만, 그래봐야 바뀌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동안 떠나간 사람들을 통해 이미 보아왔다. 김 부장에게 통보를 받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서 나왔다. 여태껏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
김 부장은 뒤에서 P를 불러댔지만 그동안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한 자신에 대한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 김 부장에게 한 번도 말대꾸 한번 해본 적도 없었고 싫은 표정 한번 해본 적도 없는 P였다. 김 부장은 그런 P를 여러 가지로 이용해 먹었다. 자기 자식들 등하교부터 자기 한약배달까지 시켰다. P는 김 부장의 모든 지시에 순종하며 근무했다. 그것이 살아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이제 회사가 어려워졌으니 나가라는 것이다. 회사가 어려워진 것은 김 부장 같은 인간들 때문이다. 회삿돈을 개인돈으로 유용해서 썼고 거래처와 각 센터에서 상납받은 검은돈이 어마어마했다. P는 그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그리고 P는 그런 검은유혹을 거절해 왔다. 김 부장은 P의 그런 부분을 껄끄러워했다.
P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돌아와 짐을 쌌다. 주위의 동료들도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말이라도 섞으면 P처럼 될까 봐, 그 사무실에서 그들과 무려 20년을 함께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 나 혼자였구나. 정말 아무도 없었구나.
P는 욕지기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혹시 누군가라도 마주칠까 봐 계단을 택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왔다. P는 더 크게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밟았다. 혹시나 그 진동에 이 건물이 무너져 내렸으면 했다.
그렇게 회사 건물을 빠져나왔는데, 햇살이 너무 밝았다. 대로변에 차들은 활발히 지나가고 횡단보도에 사람들도 뭐가 그렇게 신이난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들 있다. 모든 게 낯설었다. 이 시간이면 늘 저 사무실에 처박혀 말 같지도 않은 지시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평화가 사무실 밖에 있었구나. P는 출소한 사람처럼 가슴에 종이박스를 안고 한참을 그 길거리를 구경했다. 막상 회사를 나왔지만 갈 곳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P는 그동안 회사동료들 외에 딱히 어울리는 사람들도 없었다. P는 우물밖으로 나온 개구리 같았다. 막연한 새 세상을 마주한 애송이 개구리. 그렇게 폴짝 4차선 도로로 뛰어들고 싶었다. 회사 근처 편의점 앞 파라솔 의자에 앉았다. 담배가 생각났다. 끊은 지 15년이 된 담배였다.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와 라이터를 샀다.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콜록거리며 반은 뱉어냈다. 머리가 핑하고 돌았다. 회사건물 앞은 한가로웠다. 회사원 복장을 한 P도 한가로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본다면 아무도 부러워할지도 모를 풍경이다.
회사 단톡방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누구도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 그렇게라도 P의 엔딩을 추모하고 있는 건가? P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톡방에 나오려다가, 그래도 마지막으로 예의를 갖춰서 잘 있으라고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남기고 나와버렸다. P가 편의점 앞에 앉아있는 것은 그래도 누구가 자신을 쫓아 나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10분, 20분, 30분을 기다려도 아무도 그에게 문자하나,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정말 덧없는 기다림이었다. 그렇게 기다리자니 갑자기 화가 났다.
내가 너희들한테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냐? 야! 이대리! 넌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않냐? 내가 너 이사할 때 밤새 가면서 도배까지 해줬어! 그리고 너희 놈들 경조사 다 챙긴 사람 나 말고 누구 있냐? 그리고 너희들 급할 일 생겼다고 할 때마다 누가 대신 일해줬냐? 그런 나한테 어떻게 이렇게 대하냐? 니들이 사람이냐!
당장이라도 사무실 문을 박살내고 들어가 욕이라도 실컷 퍼붓고 싶었지만 P는 그러지 못했다. P는 애꿎은 줄담배만 피워댔다. 그래도 누구 하나라도 위로의 말이라도 듣고 싶었던 그였다. 큰 욕심도 없었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부디 잘되길 바란다는 짧은 형식적인 인사라도 듣고 싶었다. P가 떠나간 선배직원들에게 했던 것처럼.
P는 이제야 깨닫는다. 자신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별로인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그런 상식적인 인사조차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생 헛살았네. 헛살았어.
탄식이 절로 나왔다. 헛웃음이 나왔다. 눈물도 흘렀다. 오랜만에 핀 담배연기 때문일 것이다. P는 일어나야만 했다.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 되고 회사 건물에서 쏟아져 나오는 같은 목걸이를 한 불편한 사람들과 마주할 수도 있기 때문에라도.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P는 대학시절 동아리로 연극을 했다. 그렇게 연극에 매료되어 대학로에 있는 극단에 무작정 찾아가서 극단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1년을 대학로에서 포스터를 붙이다가 배우 한 명이 장염에 걸려서 대타로 무대에 서게 되었다. 말하자면 데뷔무대인 셈이었다. 배역은 군사 1이었다. 길지 않은 대사였다.
장군님! 지금 적들이 산등성이를 넘었다고 합니다!
길지 않은 대사였지만 막상 조명이 켜진 무대에 오르고 나니 앞이 하얗게 되었다. 정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무대 중앙에 불쑥 나타난 P는 땀만 흘리고 숨만 쉬고 그렇게 1분 동안 아무 말도 않고 서있기만 했다. 연출은 계속 무대에서 퇴장하라고 손짓을 해댔지만 P에 눈에는 하얀 스포트라이트만 보였다. 결국 P 때문에 무대의 조명을 꺼야만 했다. 그날 P는 극단에서 쫓겨났다. 연출은 대사를 잊어먹었으면 그냥 퇴장이라도 하지, 왜 거기에 계속 서있어서 무대를 망쳤냐고 악을 쓰며 P를 나무랐다. P는 어렵게 선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싶었다. 뭐라도 하고 싶었다. 나라는 배우가 여기 있다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하얀 조명만 바라보고 서있기만 했다.
그렇게 P는 극단생활을 접고 대학로를 떠났다. 자신이 좋아서 시작했지만 스스로를 인정할 만한 자리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던 터라 그 연출의 말이 P에게는 예언자의 말처럼 들렸다. 그때도 누구 하나 그를 잡지 않았다. 그가 없어진 자리는 아무런 티도 나지 않았다. 누구라도 채워질 수 있는 자리였다. 단 한 명의 팬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의 우스운 데뷔무대를 기억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그는 조용히 퇴장했었다.
P는 갑자기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영원 같았던 그 조명의 아득함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그의 반응을 기다리던 관객들의 숨소리가 기억났다. 그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떠났던 무대는 20년이 지난 지금 자신 앞에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또 그렇게 말없이 퇴장해야만 하는.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P의 뒷모습이 보인다. 어디로 갈지 분명한 발걸음이다. 넥타이를 풀고 가볍게 걸어간다. 편의점 파라솔 탁자 위에 P가 들고 나온 종이박스가 햇살을 받으며 덩그러니 놓여있다. 언젠가 그곳에서 퇴장당할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