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저녁
부엌 안은 따뜻했다.
바깥에서는 겨울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여기, 굴뚝 연기 가득한 작은 부엌은 오래전부터 이어진 온기 속에 잠겨 있었다. 구들장 위로 퍼지는 뜨끈한 기운이 발바닥에 스며들었고, 솥뚜껑 사이로 피어오르는 은 부러웠다, 그러나 끊임없이 방 안을 채워갔다. 나무 밥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 어머니는 손에 익은 동작으로 갓 지은 보리밥을 푸고, 된장국을 나누었다. 고구마가 찬물에 담겨 한쪽에 놓였다. 방 안은 조용했다. 숟가락이 룻을 스치는 소리, 아궁이에서 타들어가는 장작 냄새, 그리고 어머니의 숨소리만이 가끔 깨어나는 저녁. 조심스레 밥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짭짤한 된장국이 목을 타고 천천히 내려갔다. 뜨끈한 국물에 얼어붙었던 몸이
서서히 녹아들었다.
어머니는 별다른 말 없이 밥 위에 나물을 얹어주었다. 거칠고 단단한 손등에는 세월이 새긴 골짜기 같은 주름이 얽혀 있었다.
창문 밖,
바람은 여전히 창호지를 두드리고 있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함께 겨울밤은 점점 깊어져 갔다.
국 한 모금을 마시며 눈을 감았다. 가슴 어딘가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눌려 있는 듯했다. 곧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밥알처럼 목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밥을 먹는 청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없이 장작불을 다듬었다. 불씨는 툭 소리를 내며 터졌다. 그 작은 소리에 청년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부엌 한가운데, 솥뚜껑 사이로 피어오르는 김, 그 속에 투명하게 녹아든 어머니의 모습. 그 순간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말없이, 깊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한 장면처럼.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둘은 말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부엌 구석의 낡은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어, 조용히 김을 마시는 어머니. 텅 빈 마당 너머로, 바닷소리가 멀리서 속삭였다.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 손안에 있는 건
설렘도 두려움도 아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감정이었을까?
어디선가 천리의 기억이 깃들었던 것일까?
어린 시절, 비 오는 날 부엌문틈으로 어머니를 훔쳐보던 시간. 손바닥보다 더 작았던 세상이, 그때는 따뜻하고 포근하기만 했던 것을. 그러나 이제, 그 손으로 떠나야 했다 아니 떠나야만 했다. 그 시간 들은 모질게 가까워졌을 때 아직 따뜻한 이 집을 등지고, 아직 굴뚝 연기가 남아 있는 이곳을 떠나야 했다. 바람은 더욱 거세게 문을 흔들었다. 어머니는 잠시 고개를 들고, 창문 너머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건네지 않은 채, 그들은 각자의 마음속에서 각자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밥상 위에 남겨진 고구마 껍질은 하얗게 말라가고 있었다. 아궁이 속 불씨도 이젠 힘없이 꺼져가고 있었다.
청년은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손바닥에 쥔 따뜻함을, 가슴속에 품은 쓸쓸함을. 바깥공기는 매서웠다. 문을 열자 싸늘한 바람이 온몸을 감쌌다. 그러나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떠나기 전에 이곳을 마지막으로 걸어보아야 했다. 마당을 지나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굴뚝 위로 희미하게 남아 있는 연기, 젖은 흙냄새, 바다에서 밀려오는 짠 냄새가 그를 맞이했다.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어릴 적 숨바꼭질하던 좁은 골목, 여름이면 송홧가루가 날리던 담벼락, 비 오는 날마다 물웅덩이가 생기던 고샅길.
모든 것이 변함없었다.
변한 것은 오직,
자신이 떠나야 한다는 것일 뿐이었다. 하늘은 칠흑처럼 깊었다. 눈은 멎었지만, 땅은 여전히 축축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멀리, 뒷산 아래로는 희미한 등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걷다 멈추었다.
작은 우물가 옆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하얀 수건을 머리에 얹고, 낡은 겉옷을 여민 채 우물가에 서 있는 내 여인.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나의 벗. 그러나, 마음속에 몰래 감춰왔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이름. 청년은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숨결이 희미한 입김이 되어 퍼져나갔고, 그 작은 몸짓조차도 청년의 가슴을 조용히 울렸다.
말을 걸까.
이름을 부를까.
아니면, 그냥 이렇게
기억 속에만 담을까.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우물가에 두 손을 얹고, 잠시 숨을 골랐다가 고요히 몸을 돌려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눈빛으로, 심장으로, 가슴속 깊은 곳으로. 발밑의 눈은 여전히 촉촉했다. 겨울밤의 공기는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러나 가슴 한편에는 따뜻한 불씨 하나가 남아 있었다. 떠나는 길목에서, 마지막으로 그리운 얼굴. 그것이면 충분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일이면, 이 마을을, 이 바다를, 이 겨울을 등지고 떠나야 한다. 그리운 나의 벗이며 그리운 나의 고향 그러나 오늘 밤만은, 이 겨울과, 이 공기와, 이 사람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부드럽게, 그러나 확고히. 나의 밤을 잔식 하며 밤하늘을 바라본다.
바다의 향기에 조금이라도 담아볼 수 있다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