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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슬픔, 공감의 함정과 해석의 윤리>

타인의 슬픔을 이해한다는 것,

by 숨결biroso나

감정의 전염을 넘어, 고통을 주체로 존중하는 지적인 자비의 기술





1. 슬픔, 말로는 닿지 않는 감정의 심연


“지혜란 고통을 피하는 기술이 아니라, 그 의미를 이해하고 책임 있게 응시하는 기술이다.”

- 에디트 슈타인, 《공감론》


타인의 슬픔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 마음 나도 이해해”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 말의 깊이를 끝까지 감당해 본 적은 많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상실 앞에서 어색한 침묵과 무의미한 위로 사이를 오가며, 어떤 말을 해야 옳은지 헤맵니다.

누군가의 장례식장, 하얀 국화와 낮게 깔린 조문곡 사이에서 “힘내요”라는 말이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은 도리어 슬픔의 무게를 축소시키고, ‘이제는 그만 울어야 한다’는 사회의 명령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슈타인은 말합니다. "공감이란 상대의 감정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듣는 행위"다. 그때 비로소 타인의 슬픔은 ‘내가 대신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그가 겪고 있는 세계의 언어’로 존중받게 됩니다.




2. 공감의 함정 : 느낀다고 해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 ‘공감’을 인간다움의 최고 덕목이라 말하지만, 공감이 깊을수록 오히려 상대의 고통을 잘못 번역할 때가 있습니다. 가까운 친구가 상실을 겪었을 때, 진심으로 함께 아파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눈물짓던 순간이 끝난 뒤, 그의 슬픔은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었고, 나는 이미 내 감정에 지쳐 있었습니다.

심리학자 폴 블룸은 “공감은 판단을 흐리게 하고, 윤리적 선택을 왜곡시킨다”라고 말했습니다. 공감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다수의 고통에는 둔감하게 합니다. 또한 타인의 고통을 ‘나의 불편함’으로 전환시키는 위험이 있습니다.

친구의 상실 앞에서 내가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 순간, 고통의 주체는 친구가 아니라 나로 바뀌어 버립니다. 그는 위로받으러 왔다가, 오히려 내 감정을 위로해야 하는 입장이 됩니다. 이것이 공감이 지닌 가장 교묘한 함정입니다.

우리는 종종 ‘같이 느끼는 것’이 곧 ‘이해하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이해는 같은 감정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탄생한 맥락과 가치를 존중하는 일입니다.




3. 슬픔의 언어를 읽는 법 : ‘왜’가 아니라 ‘무엇을 잃었는가’


슬픔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사라졌음을 인식하는 순간의 언어입니다.

마르타 누스바움은 “감정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가치 판단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즉, 슬픔은 그 사람이 무엇을 소중히 여겨왔는지를 드러내는 정직한 기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괜찮아,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상대의 가치 판단을 지워버리는 폭력입니다. “그 일로 그렇게 힘들어할 일은 아니야”라는 뜻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이해는 ‘왜 슬퍼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무엇을 잃었기에 그렇게 아픈가’를 물어주는 데 있습니다. 그 질문은 슬픔을 병리로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고, 그 사람의 세계 속에서 잃어버린 의미를 함께 찾아가는 사유의 시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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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보다 조용한 위로를 믿습니다. 오늘도 삶을 살아내는 분들에게 마음이 먼저 도착하는 문장을 씁니다. 깊은 숨결로 마음을 건네는 사람, 에세이스트 'biroso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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