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에 머문 첫눈>

첫 눈에 묻어나는 시간

by 숨결biroso나

장독대에 머문 첫눈



장독대 위로

눈이 가만히 내려앉는다.


둥근 숨결 위로

흰 점 하나 찍히자

마당의 공기가

그제야 살며시 방향을 튼다.


처마 끝에 남은 그늘 아래

바람이 지나가며

고운 먼지처럼 눈을 흩고,


감나무의 빈 가지들은

가늘게 떨며

무언가 오래 기다린 듯

한 점의 빛을 받아 올린다.


부엌의 불빛이 창문에 번져

눈발 사이에서

젖은 종이처럼 흔들릴 때,


마루 끝에 앉아 있던 고요가

천천히 허리를 펴며

겨울의 첫소리를 듣는다.






장독대 위로 떨어진 첫 눈발은

금세 녹아 사라질 만큼 작았지만,

그 작은 흔적 하나가

마당의 시간을 조금 늦추어 놓았다.


장독 사이사이에 고여 있던 어둠은

눈이 닿는 순간

엷은 숨을 내쉬듯 부드럽게 풀렸고,

내려앉는 빛은 땅보다 먼저

오래된 집의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나무기둥에 스친 바람의 자국,

굽은 돌계단이 품은 세월의 흔적,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저녁들의 냄새까지

눈발은 천천히 닦아내듯 스며들었다.


부엌에서 끓고 있던 배춧국의 김이

문틈으로 번져 나오며

눈과 부딪힐 때,

나는 그 향으로

지나간 겨울의 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던 날들,

그날의 온기.

그날의 숨들.


첫눈이 내리는 마당은

그 모든 것을 휘젓지 않고

다만 가볍게 더듬어 주었다.

마치 오래 접어두었던 편지가

우연히 바람에 젖어

다시 펼쳐지는 순간처럼.



장독대에 앉은 눈은

잠시 머물다 사라지지만,

흰 점 하나가 지나간 자리에는

품어온 계절들이

조용히 빛을 바꾸고 있었다.



by《마음에도 쉼표를 찍는다》ⓒbiroso나



눈이 지나간 자리마다
고요만 한 겹 남아 있었다.


첫눈이 잠시 멈추게 했던 마당의 시간이 가장 오래된 기억을 안으로 불러들이는 시간이었음을.

이제 그 모든 온기를 품고, 내 안의 묵은 어둠이 아닌, 새롭게 찾아올 고요하고 따뜻한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화려한 사건 없이도 삶이 얼마나 깊은 울림을 가질 수 있는지, 잠시 멈춘 풍경 속에서 다정한 쉼표를 나누고 싶습니다.





#마음의쉼표 #첫눈의기억 #장독대의첫눈 #겨울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6화<小雪, 마음의 가장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