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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雪, 마음의 가장자리>

늦가을의 끝자락, 올겨울의 첫 문장을 적는다.

by 숨결biroso나

<절기의 틈, 흰 숨이 내려앉을 때>


낮게 깔린 공기가
스스로 무게를 지니는 날이면
우리의 마음도
조금 더 천천히 걸어야 한다.

나뭇결 끝에 걸린 빛이
마른 잎의 울음을 눌러주고
땅 아래로 스며든 온도들이
어디선가 오래된 숨을 풀어낸다.

사람들은 이 절기를
작은 눈, 소설(小雪)이라 부른다.
눈이 오지 않아도
세상은 이미 희미하게 하얗다.

말하지 못한 마음도
언제나 이때쯤이면
가벼운 서리처럼 흐르고
서늘한 바람에 흔적을 남긴다.

나는 오늘
스스로에게 귀를 기울여본다.
잠들지 못한 문장들이
퇴색한 들판에서 다시 자라나듯,

기억의 헛간에 놓인
딱딱한 슬픔 하나가
조금은 부드러운 숨이 되어
손끝으로 돌아오는 시간.

소설의 빛은
단단함과 여림 사이를 건너며
우리를 한 겹씩 벗겨낸다.
내려놓을 수 없는 것들만 마지막까지 남는다.






바람이 낮은 숨을 고르자

들판의 그늘이 조금 느려졌다.

떨어질 듯 매달린 햇빛 아래,

마른풀 한 줄기가 올겨울의 첫 문장을 적는다.


언제부터인지

눈발은 아직 내리지 않았는데

세상은 이미 흰 고요에 젖어 있다.

그 고요가 데려온 작은 떨림을 잠시 품어 본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의 울음,

지나간 계절을 닫는 마지막 문장처럼

짧고 서늘하게 맺힌다.

그 소리를 따라 하늘을 바라보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낮의 온기가 나를 감싼다.


오늘은 그렇게

겨울이 아닌 겨울의 턱끝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마음 하나를

조용히 다시 찾는 날이다.





가을의 끝자락,
시간은 얇은 비단처럼 공기에 걸려 있다.
지나온 모든 페이지들이 갈색으로 물들고,
바람은 서늘한 붓이 되어 마른 풀잎 위에
숨겨둔 이야기들을 마저 써 내려간다.


​서리 내린 창밖의 풍경이
어느 소설의 표지처럼 아득하다.
투명한 고독 속에서
작은 온기 하나를 찾아 손을 뻗는 순간,
계절은 이미 다음 장을 향해
조용히 발소리를 멈춘다.


​나무는 이제 마지막 문장을 떼어 놓은 듯
빈 가지로 서서 세상을 관조한다.
그 침묵의 틈 사이로
겨울의 첫 문장이 조심스럽게 스며들어
마음의 가장자리를 은빛으로 물들인다.


​우리 안의 시간 역시
이 절기처럼 스스로를 정리하고 다듬는 중이다.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미련 없이
오직 다가오는 빛을 품기 위해
묵묵히 뿌리를 내리는 깊은 숨결.


​이 모든 변화는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자연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위로

​그 서늘하고 고요한 공기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내면의 깊은 곳을 바라볼 여유를 얻는다.




by 《마음에도 쉼표를 찍는다》 ⓒbiroso나.



마음이 바쁘면 계절도 바쁘게 스쳐 지나가는 듯합니다. 절기상 소설(小雪)은 ‘작은 눈’을 뜻하지만, 사실 이 절기의 진짜 얼굴은 눈이 오기 전의 여백입니다. 세상이 잠시 고요해지는 그 틈, 아무 말도 없이 찾아오는 흰 숨의 시간. 그 틈에서 비로소 내 숨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들리곤 합니다. 계절은 언제나 말없이 첫 장을 넘기듯 우리 삶의 결을 바꾸고 있습니다.


삶이라는 소설 속에서, 이 절기(小雪)가 가장 정직하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쉼표이자 다음 서사를 준비하는 깊은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에도, 쉼표를 찍는다》

멈춤 속에서 피어나는 고요를 배우는 시간의 기록





#소설절기 #계절서정시 #감성시 #겨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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