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어2025<가족이라는 이름의 모닥불>

일렁이는 불꽃 속에서, 다시 숨을 고르는 밤

by 숨결biroso나

일렁이는 불꽃 속에서 다시 숨을 고르는 밤



어둠이 내려앉은 낮은 담장 아래
네 개의 동그란 그림자가 되어 앉는다.

차가운 공기 한가운데
조심스레 살아난 작은 불씨 하나
마른 나뭇가지들이 제 몸을 꺾어
소리를 낼 때마다
주황빛 꽃잎들이 밤하늘로 흩어진다

말을 아끼는 눈동자에 잠잠히 맺힌 작은 등불
고개를 숙인 어깨를 감싸 안는 붉은 파동

그 떨림이 내 손끝에 닿아 노래가 되고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문장으로 타오른다

연기는 묵은 숨을 실어 멀어지고
이 밤, 모닥불은
우리의 낮은 지붕이 되어
세상의 추위를 다정하게 막아주고 있다





12월의 끝자락, 우리는 길을 떠났다.
한 해를 마무리한다는 말이
부담으로 들리던 시기였다.


여행지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가는 해를 정리하려 애쓰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버텨왔다는 사실만으로
몸이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딸은 소리로 마음을 전하지 못하지만
그 누구보다 순수한 눈빛으로
자기만의 세상을 본다.


작은딸은 한 줄의 실수로
인생이 흔들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불 앞에 앉아 있다.


나는 곧 다시 일터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고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우리 셋의 균형을 지켜준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각자의 사연을
장작처럼 쌓아 올린 채 불을 바라보고 있다.


불꽃은 묻지 않는다.
누가 더 아팠는지,
누가 더 버텼는지.


그저
여기까지 온 숨을 조용히 데운다.


아무 말 없이 불을 보는 시간 속에서
나는
이 한 해가 실패가 아니었음을 확신한다.


아팠던 날도
멈춘 시간도
다음으로 가기 위한, 숨 고르기였다는 걸.



말하지 못해도 깊게 고이는 큰 딸의 눈동자

밀려 쓴 답안지 위로 쏟은 작은 딸의 눈물

다시 세상으로 나갈 채비를 하는 나의 떨림과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든든한 남편의 어깨


​우리는 저마다의 마른 장작을 들고

한 해의 끝자락, 불꽃 앞에 모였다.


​타닥거리는 소리는 어제의 아쉬움을 태우는 소리

일렁이는 불빛은 내일의 희망을 부르는 몸짓

장작이 제 몸을 다 태워 온기를 내어주듯

우리는 서로의 시린 구석을 안아 데워준다.


수능 ​답을 밀려 썼다고 인생이 밀리는 건 아니라고

말소리가 없어도 사랑은 온 우주를 채운다고

모닥불은 밤새 우리에게 속삭여 준다.


​재가 되어 날아가는 건 우리의 슬픔뿐

남겨진 건 서로를 지탱할 뜨거운 약속 하나.

우리는 그렇게 다시 시작할 불씨를 품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타오른다.





한 해를 마무리한다는 것은 단순히 숫자를 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온 계절의 생채기를 보듬고 다가올 시간을 맞이할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펜션으로 향하는 길 위로 저물어가는 2025년의 햇살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매일 식탁을 공유하고, 저무는 일상을 나누는 익숙한 사이지만 이번 여행은 어쩐지 말을 서로 아끼고 있었다.


장애가 있는 ​큰딸은 점점 더 아기가 되어가고 있었고,

올해 수능에서 야속하게도 영어 답안지를 밀려 써버린 작은딸은 최종 불합격이라는 차가운 결과 앞에서 재수라는 무거운 결심을 품고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올 한 해 가장 아픈 마침표를 찍었을 아이의 뒷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머문다. 또한 올 한 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해 병가까지 내는 큰 아픔이 있었다.


내년이면 상처가 된 일터로 복귀해야 하는 나의 긴장과 그동안 묵묵히,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무너져 있었던 우리 가족을 지탱하며 버텨준 남편의 무거운 어깨와 듬직함까지.

우리는 저마다의 사연을 장작처럼 쌓아 올린 채 불멍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공기가 펜션 마당을 차갑게 가라앉힐 무렵, 남편이 피워 올린 불꽃이 타닥 소리를 내며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12월의 매서운 바람도 이 불꽃 앞에서는 기세를 잃는다. 붉은빛이 일렁이자 아이들의 얼굴이 환하게 떠오른다.


나는 말 없는 큰딸의 손을 꼭 쥐었다. 따뜻해진 내 손을 느끼며 보드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곁에서 불꽃을 응시하던 작은딸의 눈동자에도 주황빛 희망이 맺혀 있었다.


"엄마, 내년엔 진짜 잘할게.

엄마도 아픈 기억 다 잊고,

다시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음 좋겠어"


말하지 않아도 아이의 눈빛이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한 번의 상처와 실수가 인생의 오답이 아님을, 타오르는 불꽃이 젖은 마음을 바짝 말려주고 있었다.


" 그래, 엄마도 더 이상

약한 모습 보이지 않을 거야.

그간 아픈 모습 많이 보여서 미안해..."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불을 바라보며 속으로만 되뇌었다. 그건 침묵이 아니라, 서로의 고통을 나누고 빈자리를 채워주는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응원이었다.




한 해의 끝에서 깨닫는다. 잘 살아온 날들뿐만 아니라, 아팠던 날들조차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땔감이 되음을.


장작이 타들어가며 내뿜는 온기는 앞으로의 나를 다독이고, 우리 가족의 내일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 실수도, 장애도, 새로운 시작의 두려움도 이 모닥불 앞에서는 그저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소중한 땔감일 뿐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불꽃은 더욱 선명해지고, 우리 가슴속엔 어떤 추위도 이겨낼 수 있는 단단한 사랑의 온기가 자리 잡는다.


2025년을 보내고

2026년을 맞이하는 문턱에서, 우리는 가족의 이름으로 다시 시작할 뜨거운 용기를 얻는다.





불꽃이 낮아질수록 올해도 조용히 낮아진다. 꺼지는 것이 아니라 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마지막 장작이 사그라들고 재만 남았을 때, 비로소 깨닫는다. 한 해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스며들어 새로운 온기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모닥불은 결국 꺼졌지만,
그 앞에서 나눈 말 없는 시간은
각자의 안쪽에서 천천히 식지 않는 온도가 되었다.


우리는 모닥불 앞에서 말 대신 숨을 나눴다

실패보다 오래 남는 건, 함께 버텨낸 시간이다.


함께 있는 이들의 숨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가족이라는 이름의 난로가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오늘의 온기로 내일을 환하게 밝힐 수 있기를요.



by 《내 마음의 풍경》 ⓒbiroso나.



​[브런치 글벗님들께 드리는 감사와 새해 인사]


2025년의 마지막 날,
이 글의 끝에서 글벗님들께 마음을 남깁니다.

그간 제 서툰 문장들 곁에 머물러 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2025년이라는 긴 여정을 무사히 마치느라 우리 모두 수고가 많았지요.

힘든 시기 브런치 작가가 되어 6월부터 글쓰기 시작했는데요. 그간 잘 쓰기보다, 겨우 숨을 이어 쓰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계속 글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읽어주시는 다정한 글벗님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말없이 다녀가신 분들,
조용히 공감해 주신 분들,
항상 격려해 주시고, 소중한 각자의 이야기를 건네주신 모든 글벗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살아내며 예상치 못한 무너진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 끝에 항상 따뜻한 위로의 빛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다가오는 2026년, 마음속에 품은 소망들이 예쁜 불꽃으로 피어나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언제나, 함께 숨 쉬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숨결로 쓰는 biroso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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