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우리들의 진짜 얼굴>

숫자로는 결코 환산할 수 없는 '숨결'의 회복

by 숨결biroso나
삶의 가치는 숫자로 된 지표가 아니라, 서로의 곁을 지키며 바라보는 온기에 있다.



도대체 우리의 대화가 언제부터 덧셈과 뺄셈으로 가득 찬 영수증이 되었을까.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야 할 식탁 위로, '돈'이라는 차가운 숫자가 예고 없이 끼어든다. 이달의 카드 명세서와 대출 이자, 그리고 노후를 위해 적립해야 할 숫자들이 대화의 주권을 잡는 순간, 다정한 안부는 설 자리를 잃는다.


"이번 달 학원비가 많이 나왔네."


"응, 아빠. 미안해... 급식비랑 교재비도 포함돼서 그래요. 그리고 모의고사 문제집도 더 사야 해요..."


숫자는 날카롭게 날아와 서로의 마음을 베거나, 차마 뱉지 못한 말들이 엉겨 붙게 하여 거대한 침묵의 감옥을 세우곤 한다.

아이의 힘없는 대답에 아빠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숟가락을 놀리지만, 그 짧은 대화 속에는 서로를 향한 미안함과 현실의 무게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그 감옥의 창살은 때로 가장 잔인한 순간에 우리를 가둔다. 수능 날, 딸아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답안지를 밀려 쓰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도 모른 채 수능 당일에는 시험 끝나자마자 딸아이는 해맑게 나에게 연신 말을 했다.


" 엄마, 점심 도시락이 너무 맛있었어. 나 너무 맛나게 먹었어요. 엄마 도시락 팔아도 대박날 듯. 진짜 최고예요."


목소리도 우렁찬 게 그렇게 해맑은 아이 표정을 보니 무사히 시험이 끝나서 후련한 기분이었겠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 수능 결과표를 보고 그제야 밀려 쓴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필... 모의고사도 아니고 수능날에 처음 이런 일을 겪다니...'


결국 최저 학력 기준을 맞춰 수시로 대학을 가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마지막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던 수시 6곳 모두 최종 '불합격'이라는 차가운 결과를 통보를 받았다.


"엄마, 내가 그때 한 칸만 제대로 봤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언니 병원비도 많이 들 텐데 내가 우리 집 돈을 다 버리고 있는 것 같아."


"아니야, 그런 소리 마.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엄마가 다시 일하기로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계획에 없던 재수라는 길 위에서, 대학 등록금으로 쓰였어야 할 돈은 매달 재수 학원비와 급식비, 교재비라는 이름의 무거운 숫자가 되어 빠져 나간다.

곧 퇴직을 앞둔 채 불안해 하는 남편은 이제나 저제나 경제적인 무게에 어깨가 굽어지고, 대화의 끝머리에는 자꾸만 돈 이야기가 섞여 든다. 아이를 원망하고 싶지 않겠지만 현실의 무게는 자꾸만 입술 끝을 뾰족하게 깎아내고 있다.


나는 잠시 내려두었던 사회의 짐을 다시 짊어지기로 했다. 나의 복직은 실은 비어버린 통장 잔고를 채워야 한다는 절박한 사정도 몫을 했다. 아침 공기를 가르며 다시 출근하는 길,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커리어에 대한 열망도 있었지만 '책임'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사랑도 있었다.

부모의 고단한 출근길과 아빠의 위축된 뒷모습을 보며, 아이는 자신의 실수가 가족의 평화를 깨뜨린 '마이너스 지표'인 양 자책하며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솔직히 나도 작은 딸이 답안지를 밀려 써서 수시 하향카드까지도 다 떨어지고 재수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내가 수능날 점심 도시락을 너무 과하게 싸줘서 컨디션이 안 좋아졌던 걸까? 평소처럼 한다고 나름 신경 쓴 거였는데..'


점심 식사 후 답안지를 밀려 썼기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왔다. 사실 나는 수능 며칠 전부터 도시락에 수저를 안 넣었을까 봐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많이 먹어서 컨디션 난조였을까봐를 걱정하고 있다니....


그리고 큰 딸에게 장애가 있어 나는 때때로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었다. 옆에서 늘 엄마가 도와 주시지만 그런 엄마가 하루하루 눈에 띄게 늙어가시는 모습을 보니 죄를 짓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작은 딸이 대학에 입학하면 이제 한숨 돌리며, 아픈 큰 딸 돌봄에 더 신경 쓸 수 있겠지...'

이런 막연한 기대감과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게 큰 욕심이었나... 하고 자책하기도 했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시험지에서 아이는 잠시 행간을 놓쳤을 뿐이며, 수능 날 겪은 그 실수는 훗날 어떤 숫자로도 살 수 없는 단단한 삶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빅터 플랑클은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라 말했다. 지금 우리 가족이 겪는 이 긴장은 숫자의 패배가 아니라, 더 단단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성장통이다.


숫자로 지어진 감옥을 부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큰 숫자가 아니라, 숫자로는 결코 환산할 수 없는 '숨결'의 회복이다. 아이가 밀려 쓴 것은 답안지일 뿐, 아이의 인생 전체가 밀려난 것이 아니다. 재수 학원비라는 지출의 숫자보다, 그 시간을 견뎌내며 단단해질 아이의 마음 근육을 믿어주는 눈빛이 필요하다.


"엄마 오늘 복직 첫 출근 잘하고 올게. 너도 스스로를 믿으며 오늘 할 일에 충실하길..
이 기회에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로 삼고 잘 해체 나갔으면 좋겠어..."

"응, 엄마 화이팅! 다시 마음 다잡을거에요. 이번 일로 느낀게 많거든요. 고마워요....엄마"




삶은 완벽하게 마킹된 정답지가 아니라, 조금은 모자라고 어긋난 틈 사이로 서로의 체온이 스며드는 과정이다.

0과 9라는 숫자 사이에는 무한한 소수점이 존재하듯, 우리의 삶도 성취와 실패라는 단 두 단어 사이에서 무수히 많은 다정한 순간들을 품고 있다.

이제 계산기를 내려놓고, 아이의 작아진 등 위로 숫자가 아닌 다정한 숨결을 얹어줄 시간이다. 밀려 쓴 답안지 너머에, 여전히 밀려나지 않은 우리의 소중한 사랑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숫자로는 결코 환산할 수 없는 '숨결'의 회복


숫자가 주는 압박감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날들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고, 내 아이만 제자리에 머무는 것 같아 불안함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지켜내야 할 것은 통장의 숫자나 성적표의 등수가 아니라, 서로의 눈을 맞추며 나누는 그 짧은 숨결의 평화입니다.


밀려버린 숫자들 사이로 아이의 가녀린 숨소리를 듣습니다.

살아가며 우리의 식탁 위에 오가는 짧은 대화 속에 얼마나 많은 마음의 부딪힘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돈'이라는 현실적인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올 때마다 부모의 마음은 미안함으로, 아이의 마음은 자책으로 물들곤 하지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의 장벽 앞에서 우리는 자주 무너집니다. 특히 사랑하는 자녀의 아픔과 경제적인 압박이 동시에 찾아올 때, 가장 먼저 메마른 것은 대화의 온도인 것 같습니다.


밀려 쓴 답안지는
다시 쓸 수 있지만
오늘의 이 시간은 단 한 번뿐입니다.


출근길 차창에 비친
얼굴에서
나는 다시 일어설 용기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모자란 채로도
서로의 하루를 지켜내는 가족입니다.


밀려버린 답안지보다 더 긴 인생의 문장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습니다.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고, 나는 다시 한번 가족이라는 이름의 지도를 펼칩니다.
우리는 여전히, 모자란 채로도 서로의 우주가 되어줍니다.


"인생의 답안지는 조금 밀려 써도 괜찮겠지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숨결이 우리에겐 있으니까요."



by 엄마의 숨》 ⓒbiroso나.


모자란 하루를 보낸 당신에게, 오늘은 숫자가 줄 수 없는 가장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

숫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가장 확실한 가치를 지켜내고 있는 모든 부모님들께 이 글을 바칩니다.



#수능재수 #숫자의감옥 #가족의대화 #숨결

화,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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