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빛이 머무는 자리로>

비어 보여도, 오래 피어오른 것들

by 숨결biroso나
명절 연휴의 소란함이 걷히고 난 뒤, 다시 오롯이 마주하는 일상의 첫 페이지,



흩어진 온기 한 조각
창밖으로 스미는 고요에
기다렸다는 듯 내려앉는다.


​붐비던 마음에 남은 빈자리
새로운 숨결로 채워질 시간
나직이 묻는다, 괜찮으냐고


​고요히 젖어드는 아침
다시 시작할 너의 오늘이 무엇을 품을지

비어 보여도, 안쪽에서는 오래 피어오른 것들. 연휴의 끝, 마음은 빛이 머무는 자리로 기울어진다.




한 해의 진짜 시작은 성취보다 살아낸 흔적이 먼저 떠오른다. 그 흔적이 곧 우리를 다시 살게 만드는 힘이다.



명절 연휴가 끝난 다음 날의 공기는 평소와 다르다. 왁자지껄했던 소리와 차례상의 온기가 빠져나간 자리에, 차갑지만 투명한 바람이 창틈으로 들어와 마치 오랜 종이책을 넘기듯 마음의 페이지를 건드린다. 사람들은 이맘때쯤 습관처럼 묻곤 한다.


"연휴 잘 쉬었어? 이제 다시 시작이네."


그 말속에 담긴 묘한 무게를 오래 들여다본다. 숫자로 된 새해는 이미 한 달을 지나왔지만, 우리 마음은 이 짧은 휴식 끝에서야 비로소 한 해를 맞이할 채비를 마친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늦은 밤의 막연한 불안, 친지들의 안부 속에 숨겨진 예상치 못한 안도의 순간, 차마 내색하지 못해 가슴속에서만 굴렸던 말 한 줄. 명절이라는 시공간이 데려온 그 작은 파문들이 사실은 우리를 가장 깊은 생각 속으로 데리고 왔다.


헤르만 헤세는 "모든 시작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어 우리를 지키고 살아가게 한다"라고 했다. 명절 끝의 이 고요한 아침 또한, 다시 일상을 버텨낼 신비한 힘을 우리 안에 채우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예전에 좋아하던 어머니의 버선 한 켤레가 떠오른다. 겉으로는 하얗고 매끄럽지만, 오래 신은 모양대로 발끝이 둥글게 굽어 있었고 천 사이사이에는 손때가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그 버선을 볼 때마다 나는 알았다. 티 나지 않는 시간이 결국 가장 깊은 삶의 무늬를 만든다는 것을.


우리의 연휴도 그렇다. 화려한 사건은 없었어도, 누군가의 밥상 앞에 앉아 보냈던 시간, 하루가 길어 벽에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던 찰나의 정적이 차곡차곡 마음의 모양을 지어왔다.


명절 끝의 첫 출근길은 마치 오래된 숨결처럼 무겁게 내려앉기도 한다. 목표했던 바를 아직 이루지 못한 해에는 유독 이런 날에 마음이 더 흔들린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비밀이 숨어 있다. 조용히 견뎌내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뒷모습이야말로 삶을 가장 깊게 만든다는 것.


"일상의 반복을 견디는 힘이 곧 생의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다"라는 말처럼, 다시 신발 끈을 묶는 오늘 아침의 결단이 유난히 또렷하게 다가온다.


달력의 빈칸을 응시하며, 나는 문득 내 안에서 오랫동안 움츠렸던 목소리들이 살며시 고개를 드는 것을 느낀다. 이 목소리들은 화려한 다짐이 아니라 겨울 볕 같은 낮은 온기로 말을 건다.


" 너는, 이미 충분히 애썼다."


"남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네 마음은 다음 계절을 향해 확실히 자라 있었다."


연휴 뒤의 고요가 좋은 이유는 그래서다. 분주함이 걷힌 자리에서 내가 살아낼 날들이 비로소 제 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하는 자리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묻는다. "정말 달라진 게 없을까?" 그러면 마음속 어딘가에서 작지만 분명한 답이 돌아온다.


"사라진 휴식보다 남겨진 온기가 더 많았다"라고.


창밖의 나무 그림자가 겨울 햇빛에 길게 늘어진다. 그늘 하나에도 계절의 깊이가 담겨 있듯, 우리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겉모습은 다시 반복되는 일상처럼 보이지만, 뿌리 아래에서는 오래전부터 또 다른 빛이 자라고 있다.


그 빛이 결국 다시 시작된 한 해의 길 위로 나를 이끌 것이다.

한 해의 진짜 시작은 명절의 소란함이 가라앉은 뒤, 비로소 마주하는 나의 고요한 결에서 시작된다.




왁자한 웃음이 머물다 간 자리에
차갑고 투명한 정적이 내려앉습니다.


손때 묻은 시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비로소 마주하는, 비어있어 정직한 마음


누군가의 안부가 문장에 맺히고
내색하지 못한 말들이 파문으로 일렁일 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가장 깊은 무늬는 소리 없이 새겨진다는 것을


다시 신발 끈을 묶는 일상
당신의 발걸음 뒤로
겨울 볕 같은 낮은 온기가 따라붙기를


이​제, 당신의 진심이 말을 건넬 차례입니다.





익숙한 자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많이 무겁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무게는 당신이 가족과 세상을 향해 내어준 온기의 무게일 것입니다. 오늘만큼은 마음을 조용히 다독여 주세요.


비워진 자리에 다시 채워질 일상을 기다립니다.
어제보다 조금 더 깊어진 눈빛을 응원합니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그저 오늘을 살아내는 것, 그것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명절의 소란함이 지나간 뒤 찾아온 정적 속에서 쓴 글입니다. 다시 일상의 궤도로 돌아오는 일이 때로는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평범한 복귀가 얼마나 숭고한 결실인지 문장으로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조용히 다시 일어서는 모든 숨결에 예의를 갖추고 싶습니다.



by 숨결로 쓰는 biroso나.


명절 뒤의 고요가 마음의 숲을 크게 흔들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발걸음 위에 올해의 풍경이 천천히 그려진다. 남겨진 것은 형식보다 깊이, 결과보다 나를 돌본 온기였다.

휴식 끝의 빛은 말한다. 다시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구정연휴끝 #일상복귀 #겨울사색 #마음의무늬 #다시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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