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문장 위로 비로소 핀 마음
글이 아니라, 숨이 되기를
막 써 내려간 문장 하나를
가만히 지운다.
소리는 없는데
무언가 무너지는 느낌이 든다.
남겨야 할 것보다
버려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걸
이 밤은 알고 있다,
지워낸 자리 위로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떼면
그제야
문장이 아니라, 숨이 남는다.
하얀 화면 위에서 커서가 깜빡인다. 마치 말 대신 맥박을 찍어내는 작은 생물처럼, 조용하고 집요한 리듬으로 침묵을 두드린다.
한 문장을 밀어 넣는다. 그러고는 곧바로 지운다.
막 태어난 문장 하나가 백스페이스 몇 번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을 나는 자주 본다. 공들여 쌓아 올린 모래성이 파도 한 번에 제 모양을 잃듯, 조금 전까지 내 안에서 뜨겁게 살아 있던 단어들이 순식간에 흩어진다.
지워진 자리엔 늘 작은 허탈함이 남는다. 손끝으로 털어내지 못한 지우개 가루 같은 것. 분명 애써 쓴 문장이었는데 없애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더 맑아지는 순간이 있다. 무언가를 더 채워 넣었을 때보다 불필요한 것을 걷어냈을 때 비로소 내 안의 말들이 또렷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지우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국자,
문장의 거품을 걷어내다
어머니는 찌개를 끓이실 때마다 떠오르는 거품을 부지런히 걷어내셨다. 한 번만 걷는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끓을수록 다시 올라오고, 다시 걷어내면 또 생겼다. 나는 그 옆에서 그 장면을 오래 보았지만, 그 수고가 맛이 된다는 사실은 오래도록 몰랐다.
"이렇게 해야, 국물 맛이 맑아진단다."
그 말이 내 손끝에서 되살아난다.
문장을 쓸 때도 그렇다. 문장 사이사이에 낀 욕심이 있다. 조금 더 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 나를 더 크게 보이게 만들고 싶은 수식,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미련. 그런 것들이 문장 위에 거품처럼 떠오른다.
그것을 걷어낸다. 한 번으로는 부족해서 다시 읽고, 다시 지우고, 다시 고친다. 어머니가 불 앞을 떠나지 않으셨듯 나 역시 한 문장이 제 빛을 찾을 때까지 문장 앞을 쉽사리 떠나지 못한다.
맑은 국물에는 대단한 비법이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낸 시간이 들어간다. 좋은 문장도 비슷하다. 문장을 빛나게 하는 것은 화려한 단어를 더하는 기술이 아니라, 끝내 남겨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가려내는 태도인지 모른다.
엉덩이로 새긴 고해성사,
견딤의 미학
글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고, 어느 선배 작가는 말했다. 그 말은 결국 잘 쓰는 재주보다 끝까지 앉아 있는 사람의 시간에 대한 고백이었을 것이다.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고독한 일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을 붙들고 한참을 노려보는 시간. 다 썼다고 믿었던 문장을 처음부터 다시 의심하는 시간.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더 나은 한 줄이 나오기 전까지는 끝내 자리를 뜰 수 없는 시간.
읽는 사람은 1초 만에 지나갈지 모른다.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 어쩌면 아무 표정 없이 넘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쓰는 사람에게 그 점 하나는 밤을 꼬박 새운 끝에 가까스로 내려앉은 결정일 때가 있다. 한 문장을 덜어내기 위해 열 문장을 써보아야 하는 날도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과정이 결국 문장의 뼈대를 세운다.
이상한 일은 그 수고가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이 있다. 그 긴 고독을 통과하는 동안 문장만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함께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무너지지 않는 문장을 쓰고 싶어서 버틴 시간이 어느새 무너지지 않는 나를 조금씩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품격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것이다.
과시하는 문장은 금방 지친다. 무언가를 보여주려 애쓰는 글은 대개 제 숨소리가 너무 크다. 그러나 오래 남는 글은 다르다. 한껏 꾸미지 않았는데도 읽고 나면 마음 한쪽이 조용히 젖어 있다. 깎일 만큼 깎여 더는 덜어낼 것이 없어 보이는 문장에서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이 번져 나온다.
그것은 글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사는 일도 그렇다. 사람도 그렇다. 상처 입고, 덜어지고, 오래 견뎌낸 자리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나이테가 생긴다. 세월은 사람을 화려하게 만들기보다 조금씩 맑아지게 만드는 쪽으로 작동하는지도 모른다.
문장을 고쳐 쓴 흔적은 어쩌면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흔적이기도 하다. 서둘러 말하지 않으려는 마음, 함부로 덧붙이지 않으려는 마음, 하고 싶은 말보다 끝내 남아야 할 말을 고르려는 마음.
그 모든 퇴고는 문장을 위한 일이면서 동시에 삶을 위한 예의이기도 하다.
빽빽한 단어들 사이
숨 하나 들여놓으려
오늘도 지우개 가루를 쌓는다.
버려진 문장들은
마음의 밑바닥으로 내려가
묵직하게 나를 받쳐준다.
화려한 무늬 하나 없어도
손때 묻은 툇마루처럼
당신의 고단한 등이
잠시 기대어 쉬어갈 수 있기를.
비움으로 짓고, 숨결로 쓴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서툰 문장을 쓴다. 금세 마음에 들었다가 곧바로 부끄러워지는 문장들, 쓰고 나면 덜어낼 곳부터 먼저 보이는 문장들. 하지만 어제보다 한 줄 덜어낼 수 있었다면, 나는 조금 더 나다운 말에 가까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지워진 문장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것들은 문장 아래쪽에 가만히 가라앉아 내 글의 바닥을 받치고 있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무게를 견디는 주춧돌처럼, 끝내 남지 못한 문장들이 남겨진 문장을 버티게 한다.
그래서 오늘도 지운다. 아깝지만 지우고, 좋았지만 덜어내고, 내 것 같았지만 끝내 놓아준다. 그러면 언젠가 누군가 내 문장 앞에 잠시 멈춰 서서, 가만히 숨을 고르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 한순간을 위해 보란 듯이 빛나는 성이 아니라 지친 이들이 잠깐 기대었다 갈 수 있는 조용한 등불 같은 문장을. 크지는 않아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한 칸의 온기를 끝내 문장 안에 지어 올리고 싶다.
덜어낸다는 것은 잃는 일이 아니라 비로소 남겨야 할 것을 알아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삶도 글도 결국은 더 많이 갖는 쪽이 아니라, 무엇을 끝내 남길 것인가를 배우는 쪽으로 깊어지니까요.
덜어낸 자리마다 꽃이 피어난다.
글을 덮고 난 뒤, 마음에 남은 것은 문장이 아니라 고요였으면 합니다.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억지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낮은 담장 너머로 번지는 라일락 향기처럼 일상에 잔잔히 배어드는 그런 진심 말입니다.
비워냄으로써 비로소 차오르는 이 기적 같은 역설이 글벗님들의 오늘을 조금 더 단단하게 지탱해 주길 소망합니다.
좋은 문장은 보태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끝내 남는 것으로 완성된다. 덜어낼 줄 아는 사람만이 끝내 자기 빛을 남긴다.
보이지 않아도, 마음은 그렇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 자리에 핀 마음》
by 숨결로 쓴다 ⓒbiroso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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