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약속, 기다림이 고인 자리

귀한 인연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시작된다

by 숨결biroso나


귀한 인연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시작된다



기다림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이미 다 살아버리는 일이다.


발걸음보다 먼저
마음이 앞서 가서 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기다림을 얹는다.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
먼저 마음을 내어주고

만나기도 전에
이미 몇 번의 계절을 혼자 건너간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 하나에도
계절을 준비하듯 마음을 고쳐 입는다.



기다림이 고인 자리에 찾아온 통증



자정이 넘은 시각,

세탁기 안에서 빨래를 한 움큼 건져 올리던 찰나 였습니다. 허리 깊은 곳에서 '지지직' 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서늘한 소리가 났습니다. 벼락은 늘 예고 없이 친다지만, 고질적인 허리 질환은 꼭 이토록 가장 기막힌 순간을 골라 잔인한 인사를 건네곤 할까요.


아... 으윽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외마디 비명은 통증의 무게에 짓눌려 공중에서 바스러졌습니다. 주저앉지도, 그렇다고 온전히 서지도 못한 채 기묘한 각도로 멈춰버린 자태 위로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습니다.

불과 몇 시간 뒤면 귀한 만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멀리 바다를 건너온 그 소중한 숨결을 마주하기 위해, 나는 며칠 전부터 마음의 옷매무새를 매만지고 있었습니다.


사무실을 서둘러 갈무리하고 금쪽같은 연차를 냈던 건, 한 끼 식사의 만남이지만 브런치에서의 소중한 인연, 오로지 그분께만 온전한 하루를 내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요사이 새로운 사람과 마주하는 일을 그토록 망설였으면서도, 내 모습은 아이처럼 들떠 있었습니다. 어떤 장소가 좋을까, 메뉴는 무엇이 입에 맞으실까 고민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새로 머리를 만져야 할까, 어떤 옷을 입어야 첫인사가 다정하게 보일지 고민하던 그 설렘은 상처 입은 트라우마 뒤에 깊숙이 숨겨두었던 나의 살아있는 생동감이었습니다.


사실 이번 만남을 기대하면서도 약간의 망설임이 소용돌이쳤습니다. 얼마 전 마주했던 직장 내 괴롭힘의 시간은 단단한 감옥이 되어 나를 가두었거든요.


그 신중함은 누군가를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방식이었고, 동시에 상대에게 함부로 마음을 건네지 않기 위한 나름의 예의였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나를 겨우 겨우 숨 쉬게 한 것은 브런치에 꾹꾹 눌러쓴 글들이었습니다. 필명 뒤에 글을 올리며 보낸 10개월. 누군가에게 이 공간을 들키면 나의 마지막 숨구멍마저 막혀버릴까 봐, 출간 제안조차 묵묵히 지나치며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누군가를 만난다는 일은 내게 단순한 약속이 아니 었습니다. 사람을 다시 믿어도 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었고, 내가 다시 누군가 앞에 서도 되는지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선뜻 마음을 내어보고 싶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문턱마다 발을 걸었지만,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결국 사람의 온기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그 한 줄기 믿음을 붙잡고 싶어 낸 용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아직 내가 완전히 닫힌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어긋난 약속
기다림이 고인 자리


하지만 삶은 가끔 우리가 정성껏 빚어놓은 계획을 아주 조용하게 무너뜨립니다. 자정이 넘어 빨래를 꺼내려 몸을 숙인 찰나, 예고 없이 찾아온 허리가 꺾이는 통증. 그 감각은 나를 바닥에 주저앉히기에 충분했고, 이내 온몸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진통제를 삼키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마주한 것은 신체의 고통보다 더 깊이 박힌 미안함이었습니다.


'하필 왜 지금일까.'


허망함이 천장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습니다. 마음을 쓰고, 잘해보고 싶어서 오히려 일이 어긋난 것만 같은 지독한 역설 앞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멈춰 있었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당겨두었던 마음의 활시위가 소리 없이 끊어진 것만 같았습니다.


천장을 향해 누운 채 차마 떨어지지 않는 손가락으로 전한 사과의 메시지.

작가님, 잘 지내고 계시지요?
다름이 아니오라 오늘 반갑게 뵙기로 했는데 제가 빨래를 꺼내다 허리를 삐긋했어요. 급하게 진통제를 챙겨 먹긴 했는데 도통 움직이기가 쉽질 않네요.

하필, 귀한 만남 직전에 이런 일을 당하다니 허망하기가 그지없네요 바로 연락을 드려야 할까 고민하다 자정이 넘기도 하고, 혹시나 아침에는 기적같이 낫지 않을까 싶어 밤새 끙끙이다 ,, 이제 연락을 드리게 되었어요.

사실 오늘 여유 있게 뵈려고 연차를 내었었는데 헛된 꿈이었나 봐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약속인데 이렇게 직전에 결례를 범하게 되어 마음이 참 무겁고 죄송합니다. 소중한 시간을 비워두게 해 드려 정말 어쩌나 싶고 죄송한 마음뿐이에요.

한국엔 언제까지 계시나요? 곧 들어가셔야 되죠? 이번에 상황이 여의치 않아 못 뵙게 되더라도 작가님을 향한 반가운 마음만은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제 불찰을 부디 넓은 마음으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요. 모쪼록 남은 일정 평안히 보내시길 바랄께요.


이후 돌아온 답장은 부서진 내 마음의 그릇을 단숨에 채워버렸습니다. 가족도 허리가 좋지 않아 그 고통을 잘 아신다며, 오히려 나의 마음이 어땠을지까지 안아주시는 그 넉넉한 품. 게다가 딸아이들의 안부까지 전해 주시는 따뜻한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자책으로 들끓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거짓말처럼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몸은 비록 약속의 자리로 나가지 못한 채 침대에 묶여 있었지만, 마음만은 전해주신 이해라는 포근한 이불을 덮고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유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걷는 것조차 힘에 부쳐 병가를 고민해야 하는 처지지만, 신기하게도 통증의 날은 무뎌지고 있습니다. 아픈 곳보다 마음의 결을 먼저 살펴주신 진심은 세상 그 어떤 명의도 처방할 수 없는 가장 완벽한 마음의 약이었으니까요.

긴장으로 굳어 있던 하루가 그 문장 하나에 천천히 녹아내렸습니다. 비로소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나려 했던 사이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의 글 속에서 조용히 만나고 있었다는 것을요.


글이라는 것은 참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지요. 손을 잡지 않아도 온기를 전하고, 얼굴을 보지 않아도 마음을 짐작하게 하며,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방향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이미 충분히 깊어집니다.


비록 함께하지 못했지만, 마음은 이미 귀한 인연 곁을 다녀온 뒤였습니다. 비워진 약속의 자리마다 전해지는 마음이 조용히 고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온기 덕분에 사람을 다시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멈춰버린 발걸음 위에 내린 온기



옷매무새 고치고 첫마디를 고르며
콧노래 부르던 그 설렘이 무색하게
필명 뒤에 지켜온 열 달의 숨구멍이
적막한 방 안 가득 한숨으로 고입니다.


멀리서 오시는 당신을
이 투박한 품에 꼭 한번 안아보고 싶어
하루의 시간을 오롯이 비워두었는데
너무 마음을 써서 그릇이 먼저 깨진 걸까요


미안함이 옹이처럼 가슴에 박혀
진통제로도 삭지 않는 밤을 건너갈 때
당신은 오히려 내 아픈 자리에
꽃잎 같은 문장을 덮어주었습니다.


비어버린 약속의 자리에
당신의 사랑이 찰랑찰랑 차오릅니다.


못다 한 만남은 그리움으로 숙성되어
다음에는 더 향기로운 차로 우려나겠지요.


아픔은 나를 멈추게 하지만

글 하나에 포개진 마음은 나를 다시 살게 합니다.


무너지지 않는 법을 배우는 이 시간
나는 당신의 온기로 다시 빚어지는
작고 단단한 질그릇이 되어갑니다.



우리는 때때로 계획이 어그러졌을 때 비로소 진심의 깊이를 알게 됩니다. 직접 만나지 못한 그날의 빈자리는 오히려 서로의 마음을 더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이렇게 마음을 먼저 건넨 인연은 언젠가 더 편안한 모습으로 다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갑작스러운 사고로 몸도 마음도 많이 놀랐지만, 돌이켜보니 이 비어버린 연차는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직접 마주하지는 못했어도, 서로의 진심이 확인된 그 틈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니까요.


나만의 숨구멍이라 여겼던 이 소중한 글의 공간이, 이제는 누군가와 온기를 나누는 광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작은 희망을 품어봅니다.


통증은 몸을 잠시 멈추게 했지만, 그 멈춤 덕분에 서로를 알아보는 귀한 인연의 깊은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다시 사람의 온기로 치유해 가는 이 과정이 내 삶을 더욱 단단하게 빚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이제 무사히 돌아가시고 계시겠지요? 귀하게 내어주신 발걸음을 직접 마중하지 못한 죄송함이 여전히 크지만, 작가님이 남겨주신 따뜻한 격려와 애정 어린 말씀들이 제게는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더 많은 것이 채워지기도 합니다. 아픔을 견디는 당신 곁에, 당신의 평안을 간절히 바라는 따뜻한 진심이 머물고 있음을 잊지 마시길요.


부서진 틈으로 더 단단한 마음이 돋아납니다. 가지 못한 길 위에 남겨진 온기들이 결국 우리가 다시 살아가는 이유가 됩니다.

비어버린 자리에도 마음은 남는다. 어긋난 순간 위에 더 깊은 이해가 쌓이고, 다음 계절은 이미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마음은 그렇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 자리에 핀 마음》

by 숨결로 쓴다 ⓒbiroso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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