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낸 자리마다 돋아나는 계절의 숨결
겨울을 넣고 봄을 꺼내던 날,
내가 정말 옮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살을 에던 그 계절을 견디게 한 것이
정말
저 무거운 외투의 온기였을까.
계절은 몸을 접어
서둘러 사라지는데
나는 아직
남아 있는 겨울을 눌러 담는다.
손목 끝에 걸리는
이 묵직한 저항은
버리지 못한 것들이 끝내 남긴 무게
가벼워진 방 안으로
서늘한 바람이 스쳐가고,
몸살 같은 어깨 위로
늦게 도착한 햇살이 내려앉을 때
그제야
하나를 내려놓는다.
“이걸 다 어쩌나.”
쌓인 옷가지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한 발짝만 더 다가가면
끝까지 해야 하는 일들,
끝내고 나면 늘 조금은 달라져 있는 것들.
창가로 들어온 빛은 이미 따뜻함을 넘어서 있었다.
봄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빠르게 달아오른 공기.
그런데 내 손에 들린 것은 아직 겨울이었다.
두툼한 코트, 묵직한 니트, 손목을 잡아당기는 무게.
스웨터 하나를 집어 접는다.
공기를 밀어내듯 꾹꾹 눌러 담는다.
상자 바닥에 닿는 순간,
옷보다 더 무거운 것이 함께 내려앉는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지치는 걸까.
단순한 정리일 뿐인데
몸은 하루를 다 살아낸 사람처럼 무겁다.
허리는 조금씩 굳어가고
손끝은 점점 둔해지고
방 안은 계절들이 서로 밀쳐내며 뒤엉킨다.
옷을 접다가 문득 멈춘다.
이 옷, 언제 입었더라.
그날은 분명 추웠고
나는 서둘러 이 녀석을 꺼내 입었고
어쩌면 그날의 기분까지 같이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버리지 못했을까.
옷에는 저마다의 체온이 남는다.
몸의 온도가 아니라
그때의 마음 온도 같은 것.
그것까지 함께 보관한다.
그래서인지
정리는 늘 단순한 일이 아니다.
물건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기억을 건드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 계절은 너무 빠르게 건너간다.
봄은 잠깐 스치고 지나가고
여름은 기다림 없이 밀려온다.
그래서 우리는 준비한다.
조금 더, 조금 더.
얇은 옷도 필요하고
두꺼운 옷도 필요하고
언제 다시 추워질지 몰라서
언제 더워질지 몰라서
그 ‘혹시’라는 말이
집 안에 쌓이기 시작한다.
혹시, 필요할지도 몰라서
혹시, 다시 입을지도 몰라서
혹시, 없으면 불편할까 봐
그렇게 쌓인 것들은
어느 순간 물건이 아니라
가능성이 된다.
살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우리는 현재를 점점 무겁게 만든다.
나는 다시 손을 멈춘다.
지금 내가 힘든 이유는
정말 짐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놓지 못해서일까.
물리학에서는
물체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탄성 한계'라고 부른다.
그 지점을 넘어서면
아무리 힘을 빼도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
너무 오래 쥐고 있으면
마음은 서서히 굳는다.
놓는 법을 잊어버린 채
잡고 있는 상태가 기본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더 힘들다.
놓지 않아서 안전한 게 아니라
놓지 못해서 계속 긴장한 상태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문득
예전에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불이 나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한참 뒤에 조용히 말했다.
“다 없어지고 나니까,
내 삶에 무엇이 없어도 되는지가 보이더군요.”
그 말은 슬픔을 덜어주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정확하게 파고드는 말이었다.
우리는 늘
무엇이 있어야 사는지에 집중한다.
그래서 계속 쌓는 것일까.
더 가지면 덜 불안할 것 같아서
더 준비하면 덜 흔들릴 것 같아서
하지만 이상하게도
쌓일수록 더 흔들린다.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질수록
삶은 점점 좁아진다.
삶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 보다
무엇이 없어도 괜찮은가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정리를 끝낸 방 안에
작은 틈이 생겼다.
옷걸이 사이
상자 위
비워낸 자리
그 사이로
공기가 천천히 흐른다.
그제야 알게 된다.
숨이 막혔던 건
방이 좁아서가 아니라
비어 있는 자리가 없어서였다는 걸.
우리는 공간뿐 아니라
시간도, 마음도
너무 가득 채운 채 살아간다.
그래서 숨이 짧아진다.
삶은 채워야 안정되는 것이 아니라
비워야 유지되는 구조에 더 가깝다.
나무가 겨울마다 잎을 떨어뜨리는 것도
가벼워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다.
붙잡고 있으면
버티는 삶이 되고
놓아야 흐르는 삶이 된다.
겨울을 넣고 봄을 꺼낸 오늘
나는 옷보다 더 많은 것을 옮겼다.
쌓아둔 물건의 무게보다
그것들을 놓지 못한 마음
비워낸 자리마다
이상하게도
숨통이 더 트인다는 것을
삶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 보다
무엇이 없어도 괜찮은가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손끝에 남아 있던
겨울의 체온
다 접어 넣었는데도
왜
계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비워낸 자리에서
먼저 움직인 건
바람결이 아니라 내 숨이었다.
비워낸 자리마다
돋아나는 계절의 숨결
창가로 스며든 볕이 벌써 따갑습니다. 먼지 냄새가 밴 두터운 겨울 옷가지들을 돌돌 말아 상자 속에 꾹꾹 눌러 담습니다. 손목 끝에 걸리는 묵직한 저항감, 일 년 만에 다시 치르는 이 익숙한 의식 앞에서 어쩐지 몸은 예전보다 더 깊게 가라앉습니다.
봄이라는 다정한 완충지대를 건너뛰고 벌써 여름의 성급한 열기를 내뿜는 공기 때문일까요. 겨울과 여름, 그 극단의 계절 사이 어디쯤에서 우리는 이 방대한 옷가지들을 이고 지며 몸살 같은 하루를 보냅니다.
정리를 끝낸 방 안에는 비로소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날 자리가 생겼습니다. 비워낸 만큼 영혼의 보폭은 조금 더 넓고 가벼워졌을까요. 짐을 이고 사는 삶이 아니라, 짐을 내려놓고 비로소 계절의 숨결을 온몸으로 맞는 삶을 꿈꿔봅니다.
어쩌면 가장 완벽한 옷장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그래서 모든 계절을 다 품을 수 있는 텅 빈 공간일지도 모릅니다.
계절을 갈아입는 일은 옷을 바꾸는 노동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붙잡고 살아왔는지를 비로소 만져보는 시간이다.
겨울옷을 정리하다가 멈춰 선 순간,
단순한 집안일 하나가 왜 이렇게까지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 생각하다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옮기고 있었던 것은 옷이 아니라
'놓지 못했던 나'였다는 것을
그래서 이 글은 정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붙잡고 살아온 삶을 내려다본 하루의 기록입니다.
비워낸 자리마다 공기가 달라졌다.
가벼워진 것은 옷장이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른다.
짐을 이고 사는 삶이 아니라
계절이 스쳐갈 자리를 남겨두는 삶.
오늘의 빈틈 하나가
내일의 숨을 조금 더 깊게 만든다.
우리는 부족해서가 아니라 놓지 못해서 무거워진다. 오늘 내려놓은 것 하나가 내일의 나를 조금 덜 흔들리게 한다.
보이지 않아도, 마음은 그렇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 자리에 핀 마음》
by 숨결로 쓴다 ⓒbiroso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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