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차 가고 벤츠 온다'
흔히 개차반 같은 이성을 만나다가 보내줄 때 우스갯소리로 농담반 진담반으로 생겨진 말이다.
마흔이 다 돼 가다 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되는데 내가 소개할 똥차는 이성이 아닌 동성친구.
그때 당시엔 대단한 절친이었다.
처음에는 나와 정말 결이 맞다고 생각한 친구였지만 양파처럼 서로의 성격을 벗겨내면 낼 수록 이 친구의 진가가 나타났다.
바로 나르시시즘.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런 전문적인 단어로 그 친구의 성격이 설명이 안되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저 나르시시즘에 당하는 에코이스트였다.
친구의 나르시시스트적인 성격은 애당초 일찍이부터 발현이 됐다.
눈치 없는 내가 눈치를 못 챈 게 문제였지만.
같이 사진을 찍으면 내 얼굴만 크롭 해서 sns에 올린다거나 항상 나를 비하하듯 말하는 심보가 너무나 티가 났다.
하지만 당시 눈치를 많이 보던 나는 에둘러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나 스스로 비하적인 발언까지 하며 물었지만 그 친구는 마치 앵무서처럼 늘 하던 말이 있었다. '네가 예민한 거야. 나 원래 그래'
나는 또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내가 정말 예민한 줄로만 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타는 차, 나의 취미...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깎아내리기 바빴고 나의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말하기 일쑤였다.
나는 그 친구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상처는 쌓이고 쌓여서 길고도 짧은 15년의 인연을 끝냈다.
그로부터 2년 뒤. 나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됐다.
처음엔 많이 어색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게 즐겁기보다 조심스러운 일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를 하기 전에도 ‘이 말이 거슬리진 않을까’, ‘내가 또 예민한 건 아닐까’를 먼저 생각했다.
습관처럼 나를 검열하고, 낮추고, 미리 사과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친구들은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변명하지 않아도 됐다.
내 취미를 두고 비웃지 않았고 내 감정과 인격을 존중해 주었다.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 이게 보통의 관계구나.
누군가를 만나고 나서 기분이 축 처지지 않는 것.
집에 돌아오는 길에 혼자 곱씹으며 자책하지 않는 것.
관계 안에서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정상적인 건강한 관계였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그제야 과거의 15년이 흐릿해졌다.
그때의 나는 늘 설명해야 했고, 늘 이해해야 했고, 늘 참아야 했다.
상대의 기분은 중요했고 내 기분은 늘 과민 반응이 됐다.
나는 친구를 잃을까 봐 나 자신을 계속해서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똥차가 가고 벤츠가 온다는 말이 꼭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난다는 뜻도 있겠지만,
오히려 나를 소모시키던 관계가 떠난 자리에 나를 있는 그대로 대하는 사람들이 남았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 관계를 선택할 수 있게 된 ‘나 자신’이었다.
마흔이 다 되어가서야 알게 된 사실 하나.
오래된 인연이 좋은 인연은 아니고, 힘든 관계를 버렸다고 해서 내가 못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똥차를 떠나보낸 뒤에야 나는 비로소 충분히 좋은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