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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Apr 11. 2022

밤 껍질을 까면서

설이나 추석, 제삿날을 가리지 않고 밤을 치는 것은 언제나 아버지의 몫이었다. 단단하고 질긴 겉껍질을 벗겨내는 것조차도 힘에 부치던 어린 내게 속껍질을 깎아내는 것은 아버지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로 여겨졌다. 바람이 갈대를 흔들 듯 세월이 아버지의 손을 흔들기 전까지 아버지는 언제나 동글동글하면서도 각이 서게 밤을 치곤 하셨다. 그렇게 친 뽀얀 밤들은 잘 찍어낸 벽돌처럼 수십 층을 쌓아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제사나 차례상에 오를 밤은 껍질을 ‘벗겨내는’ 것도, ‘깎아내는’ 것도, ‘베어내는’ 것도 아닌 ‘치는’ 것이었다. 먼저 예리하게 벼려진 한 뼘 남짓한 한 작은 칼로 기계가 깎아내듯 고르게 밤의 넓은 두 면을 평평 납작하게 쳐서 모양을 잡는다. 다음으로 그 평평 납작한 두 면을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잡은 후 중지를 이용해 한쪽 방향으로 돌리고, 다른 손에 잡은 칼로 재빠르게 올록볼록 골이 진 살들을 툭툭 몸 밖으로 밀어낸다. 중간에 먹줄이라도 친 것처럼 먼저 위쪽 절반을 한 바퀴 돌리면서 비스듬히 쳐낸 다음 위아래를 바꿔 또 한 바퀴를 돌리면서 쳐내면 드디어 뽀얀 속살의 밤알 하나가 완성된다.

 

몇 년 전부터 명절이나 제사 때 밤을 준비하는 것은 나의 몫이 되었다. 몇천 원이면 깎아놓은 밤 한 접시를 살 수 있는데도 제사를 모셔온 이래 깎아놓은 밤을 산적이 없다. 밤은 의례 가장이 준비하는 것으로 각인된 때문인지, 가을마다 한 톨 한 톨 힘들게 모아 보내주시는 어머니의 정성을 외면하는 것 같아 그런 것인지, 손수 밤을 마련하는 것이 제사를 모시는 정성의 척도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되는 일종의 강박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밤은 언제나 내가 직접 껍질을 깎아야 할 것 같은 의무감 같은 게 든다. 


설날인 오늘 아침에도 밤을 준비했다. 명절이면 전날 저녁에 준비를 마치곤 했는데 오늘은 눈을 떠서야 화들짝 밤 치는 것을 까먹은 것이 생각났다. 부랴부랴 칼을 갈고 밤을 꺼내 겉껍질을 깠다. 아버지처럼 밤을 ‘치는’ 것을 포기한 지는 한참이다. 몇 번인가 아버지의 칼질을 흉내 내보려고 시도해봤지만, 번번이 신통치 않은 칼질 솜씨와 어눌한 손놀림만 확인하곤 했을 뿐이다.     


오늘 밤 껍질을 까면서 문득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밤을 치셨을까 궁금해졌다. 아버지는 제사상이나 차례상에 밤을 올리는 의미를 알고는 계실까? 아버지를 따라 제사를 지내고 차례를 지낸 지 수십 년이 되도록 한 번도 상에 올려진 대추와 밤과 배와 사과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어쩌면 모르고 계시거나 알아도 설명할 만큼의 수준은 못 되는 것 같다. 


홍동백서(紅東白西)와 조율이시(棗栗梨柿), 어동육서(魚東肉西)의 진설법이야 팔 십몇 년, 평생 상을 차리면서 눈으로 익히고 손으로 익힌 것들이라 익숙하시겠지만, 대대로 가난밖에 유전된 것이 없는 집안에서 밤 한 톨, 대추 한 알의 의미를 일일이 가르쳐 후대에 전하게 한다는 것이 그리 쉬웠겠나 생각이 미치면 오히려 아버지의 무지에 숙연해진다.    

 

그래도 나는 안다. 비록 아버지가 밤 한 톨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셨어도 아버지가 치신 밤 한 톨 한 톨에 얼마만큼의 정성이 들어가 있고 기원이 배어있는지를 알고 있다. 직접 밤을 준비해 본 사람은 안다. 철갑 무장(鐵甲武裝)인 양 단단하고 질긴 겉껍질을 벗겨내고 누빈 무명옷처럼 칼날을 무디게 하는 속껍질을 깎아내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지 안다. 그 귀찮고 지루한 생각을 내려놓고 집중을 하다 보면 어느새 숙연한 기도가 되고 기원이 된다는 것을 해 본 사람은 안다.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똑똑하고 배운 사람들이 숭고하게 부여한 밤 한 톨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 알지 못할지라도 아버지는 밤을 치면서 누구보다 간절한 기도와 절박한 기원을 하얀 속살에 새기곤 하셨음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묵주인 양 염주인 양 밤을 돌리고, 보석을 깎아내듯 정성을 다해 깎고 다듬는 행위가 간절한 기원이고 기도였음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혼사를 며칠 앞둔 딸애가 한 술도 뜨지 않고 예비 사돈댁에 인사를 가겠단다. 차례상을 물리자마자 부리나케 아침에 까다가 남긴 밤을 깠다. 이십여 톨, 채비하고 나서는 딸에게 가는 길에 차 안에서 먹으라고 주었다. 한알 한 알에 내 기도와 기원을 영글게 새겨 넣었다.   

  

* 여느 식물들과 달리 싹이 나고 뿌리를 잡을 때까지 씨밤이 썩지 않은 채 뿌리에 달려있는 밤은 죽어서야 비로소 자식 걱정을 내려놓는 부모의 마음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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