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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Apr 11. 2022

구두를 닦으며

내게 구두를 닦는 것은 명상과 매한가지다. 꼬리를 무는 망상을 잘라내지 못한 채 양 발이 저리도록 앉아만 있는 무늬만 명상보다 더 명상다운 명상이다. 가죽 표면의 먼지를 털어낸 다음, 세상의 모든 색을 한데 넣고 졸여낸 듯 시꺼먼 구두약을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에 찍어 가죽에 먹인 후 유리보다 투명해질 때까지 광을 내는 일련의 과정과 행위는 어떤 유파의 명상이나 수행보다도 도에 가깝다. 


잘 닦인 구두 등마루에는 거울이 생긴다. 그 거울에 비친 나를 만나는 순간 한 경지를 터득한 고승이라도 된 듯 환희심이 인다. 미소년 나르키소스가 우물에 비친 제 모습에 반한 것인데 반해, 나는 구두에 만들어진 맑은 거울을 찬탄할 뿐 그 속의 얼굴에 반한 것은 아니다.   

  

처음 구두를 신은 것은 대학 3학년이 되어서다. ROTC 1년 차에게는 ‘단복’이라고 하는 제복과 함께 검정 단화 한 켤레가 지급되었는데, 1년 차에게 단화의 광택은 군기(軍紀)와 비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1년 차가 끝날 때까지 구두 광택 내기는 하루도 거글 수 없는 과제였고, 닦는 횟수에 비례해 점점 더 투명해지는 것은 수행의 진전과도 같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줄곧 직접 구두를 닦았다. 일요일 오후 햇살 좋은 베란다에 신문지 몇 장 깔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구두를 닦는 것은, 공들여 닦은 투명한 구두에 얼굴을 비춰보는 것은 내 나름의 수행이고 명상이었다. 닦으면서 닦았고, 닦은 만큼 맑아졌다.      


오늘은 아들의 첫 구두를 닦았다. 스물여덟 아들에게 사준 첫 구두다. 제 누나 혼례 때 입을 양복에 맞춰 신게 사준 것이지만, 이 구두를 신고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내달렸으면 하는 아비의 바람을 몰래 새겨 넣은 구두다. 마음의 짐을 지우는 것 같아서 내색조차 못 했지만, 구두를 신을 때마다 구두약에 섞어 덧칠한 염원이 발가락 끝에서 온몸으로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덧칠 위에 덧칠을 거듭했다.     


내 구두를 닦는 것이 명상이라면 아들의 구두를 닦는 것은 기도임을 깨달았다. 한 그릇 정화수를 올리고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빌던 할머니 어머니의 기도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묵묵한 염원과 매한가지임을 깨달았다. 이제 내게 구두를 닦는 것은 명상이자 간절한 기도가 되었고, 염원이 되었다. 

    

거울처럼 맑아진 구두가 신기한 듯 아들은 한참을 들여다본다.


이번 주말에는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야겠다.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녹슨 유기그릇처럼 뿌옇게 바랜 가죽을 공들여 닦다 보면 아버지의 마음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명상과 기도로도 만나지 못한 그 무엇인가를 깨닫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주말에는 꼭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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