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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Apr 16. 2022

조지 오웰의『1984』를 다시 읽다

- 조지 오웰의 눈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다  -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가상의 국가 오세아니아 정부 진리부(眞理部)의 슬로건은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조지 오웰이 그의 소설에서 예견했던 1984년이 지난 지 38년이 되었다. 인류 역사상 최대 격변의 세기인 20세기가 지나고 21세기가 시작된 지도 20년이 넘었다. 그런 시기에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다시 꺼내 읽기 시작한 것은 지난 2월 발발한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이다. 과연 조지 오웰이 그렸던 1984년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인류는 그의 소설이 그린 디스토피아에서 몇 발자국이나 벗어났는지 그의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3월, 어느 방송인가에서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한 러시아 국민들의 인식을 보도한 적이 있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고 있지만, 러시아 국민들의 푸틴 대통령 지지율은 70%를 넘고 있으며, 자국 군인들이 우크라이나를 나치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전쟁 중인 것으로 알고 있을 뿐 명분 없는 파괴와 민간인 살해 등 전쟁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고, 알 수도 없다는 보도였다. 또한, 오늘 아침(4.14)에는 전쟁에 찬성하는 국민이 80%를 넘는다는 보도도 나왔다.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킨 지도자에 대한 70%를 상회하는 지지율과 전쟁의 실상을 일절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게 통제된 상태에서 자국이 일으킨 전쟁에 80%가 넘는 지지를 보내는 국민, 그리고 그 국민을 통제하고 호도하는 국가는 소설 속 오세아니아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가상의 국가 오세아니아의 텔리 스크린보다 더욱 정교하게 작동하는 일상의 감시시스템과 통제장치들, 소설 속에서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진실을 훤히 알면서도 교묘하게 꾸민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이중사고 내지 현실 제어’, 그리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확증 편향과 무지와 무관심...... 이 모든 것들이 시공을 뛰어넘어 지속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더욱 정교하게 발전하여 여전히 권력 유지의 유효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1984』는 미래의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공포를 형상화한 소설이다. 책이 발간된 1949년으로부터 35년 후인 1984년에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에서 벌어지는 인간 말살의 참상을 고발하는 책이다. 실제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을 기점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 진영과 소련을 필두로 한 공산 진영으로 양분된 가운데 상당수 공산 진영의 국가들은 물론 민주주의를 표방한 국가 중에도 적지 않은 국가들이 조지 오웰이 그린 가상의 1984년의 세계를 현실의 세상에 한 치 어긋남이 없이 구현함으로써 그의 예언을 현실화하였다.      


그리고 1984년으로부터 38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종식될 것으로 여겨졌던 전체주의는 여전히 다양한 모습으로 건재하여 세상의 한 축을 잠식하고 있다. 다양한 이름의 민주주의로 화장을 하고, 더러는 빅 브라더와 한 치 다를 것 없는 神을 앞세워서 오웰의 예언을 무오류의 진리이자 역사로 기록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단편적인 사례로,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궤변과 중국의 동북공정의 예에서 보듯이 과거는 얼마든지 현재의 힘에 의해 지워지거나 변조될 수 있고, 현재 또한 모든 사람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가운데서도 사실과 다른 모습으로 윤색되어 엄연한 역사가 될 수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문명의 발달 속도와 무관한 힘의 논리가 여전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는 소설 속 지배집단 ‘英社’(영국 사회주의당)의 슬로건이 한갓 소설 속 언어의 유희가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아울러 나라를 가리지 않고 동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특정인 또는 세력에 대한 광신과 맹신, 광신적 팬덤현상에서 빅 브라더와 당에 대한 맹목적 충성의 또 다른 모습을 본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정파에 치우쳐서 충동질하고 호도하고 비난하는 목소리들에서는 텔리 스크린에서 퍼져 나오는 소름 돋는 음성을 떠올리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보화의 총아인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알고자 하는 정보에 접속하고 확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가능하고, 스스로 정보의 생산자가 되어 의사를 표출하고 유통하는 것이 자유로워진 2022년에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1984년 아니, 오웰이 소설을 쓰던 1949년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아직도 1984년 오세아니아의 체제와 이념은 사라지지 않고 존속하여 성장하고 번식하는 것일까? 절대권력에 대한 욕망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구석구석 독버섯처럼 돋아나 어느새 생태계의 중심을 잠식한 자발적인 ‘스파이단’과 사설 사상경찰에 기대어 비위를 맞추며 충동질하고 조종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정파와 파당의 이익을 위하여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틀마저 구미에 맞게 뜯어고치는 짓도 서슴지 않는 자들에게 국민은, 시민은 여전히 『1984년』 속 하층계급이자 종(從)에 불과한 것일까?  

    

1984년에서 4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과연 소설 속 주인공 윈스턴이 생각한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 사회는 구현된 것일까? 과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오세아니아 진리부의 슬로건 -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난 것일까?     


깨어 고집스레 새벽을 알리는 닭이 없으면 새벽도 여전히 한밤일 수 있음을 생각한다, 전쟁이 얼마든지 평화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음을 보고 있기에. 닭울음소리에 깨어있지 않으면 예속이 자유가 될 수 있음을 본다. 무지가 힘이 되는 세상이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생각한다.  

    

워낙 알려진 책이라 달리 내용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저 조지 오웰의 눈으로 오늘의 세상을 바라보고 시대를 앞선 그의 경종에 잠시 귀 기울이며 自問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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