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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Apr 17. 2022

퇴직자 불안 증후군

몇 년 전 청와대로 출근할 때의 일이다. 경찰청에서 총리실에 파견 나와 있던 대학 동문 선배 한 분과 후배 몇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전부 공직에 있던 후배들에게 들려준 선배의 덕담 겸 당부가 아직도 또렷하다. “공직자는 공직에 있는 동안은 학처럼 살아야 한다. 학이 오물이 있는 곳에 가면 금세 흰 날개에 얼룩이 진다. 앉을자리 가려 앉아서 언제나 하얀 학처럼 살아야 한다.”   

         

최근 우리 집 재무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아직 대출금도 다 못 갚은 경기도 외곽의 아파트 한 채, ‘하차감’과 무관한 중소형 자동차 두 대, 오래전 지인들과 공동으로 마련한 강원도 영월 산중의 텃밭 딸린 농막 한 채, 앞으로도 3년은 다달이 더 갚아야 할 아들 학자금 융자, 지난 2월 만기를 1년 더 연장한 마이너스통장.     


30년 직장생활 중에 오물 근처에 가본 적도 없고, 등 떠밀려 오물에 스친 적도 없거니와 모아 놓은 재산도 변변치 못하니 나는 천상 학이다!      


가난했지만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반 없었다. 워낙 가난에 익숙했던 데다 결혼생활조차도 소꿉장난처럼 구색 없이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숟가락 하나 옷 한 벌 늘어나는 것, 심지어 하나둘 애들이 늘어 좁은 집안이 빼곡해지는 것에도 부자가 된 기분이 들곤 했다. 손에 쥔 것의 총량이라야 변변찮지만 어찌 됐든 살면서 세간도, 거처도 늘면 늘었지  줄어든 적이 없었으니 부자가 아니면서도 늘 부자였다.   


그런데, 근래 불과 보름 남짓한 동안에 나 자신이 참 가난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생각에 잠시 흔들렸다. 계기 중 하나는 덜컥 퇴직을 하게 된 때문이다. 지금까지처럼 뭐든 늘리고 불리는 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더는 여의치 않은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그래서 가진 게 얼마인지 헤아려도 보고, 앞으로 어찌할까 곰곰 고심도 해보았다. 당연히 당장 뚜렷한 방도가 생길 리 만무하다. 그래서 문득 가난을 느꼈다.     


결정적으로 가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지난 3월 말 지방 소재 모 회사의 사옥 신축 기공식 행사에 참석하면서부터다. 그 자리에서 갑자기 ‘다소의 부족’ 정도가 아닌 ‘가난’을 느꼈다. 행사장은 임직원은 물론이고 손님들로 북적였다. 분주하게 손님을 맞고 직접 사회까지 보며 행사를 진행하는 회사 대표의 모습은 당당하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특히나 면바지에 점퍼 차림은 나를 비롯해 양복에 넥타이까지 갖춰 입은 손님들과 대비되면서 ‘소탈함’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적당치 않은 어떤 특권 내지 아우라처럼 느껴졌다.  

        

기공식 행사는 식순에 따라 회사 대표의 인사에 이어 귀빈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그중 회사 대표의 대학 동문이자 지역 봉사단체 대표라는 분의 축사를 들으며 나는 순식간에 가난에 빠졌다.      


“회장님과 저는 같은 대학교 봉사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하였습니다. 저는 졸업 후에도 계속해서 봉사단체를 꾸려 왔는데, 월급쟁이 생활이란 게 뻔한 것이라서 회원들의 십시일반으로 근근이 유지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 회장님께서 매년 거금을 쾌척해 주셔서 ○○지역의 유력 봉사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 회장님은 돈을 제대로 쓸 줄을 아는 분입니다........”      


‘거금’, ‘쾌척’, ‘유력 봉사단체로 성장’,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분’......      


그저 덕담일 뿐인데 무슨 까닭인지 한마디 한마디가 콕콕 가슴에 박혔다. 회사 대표를 샘낼 일도 아니고, 사회에 공헌한 것에 대한 칭송을 시샘할 것도 아니련만, 그러그러한 단어들이 내 형편과 행적을 꼬치꼬치 캐묻고 확인하는 체크 리스트 항목처럼 들리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고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대표의 당당한 모습, 축사 속 그를 추키는 말들과 이제는 직장이라는 울타리도, 알량한 지위도 사라진 데다 세상에 드러내 놓을 만한 성취도 변변치 않은 내 모습이 대비되면서 불현듯 현실을 지각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일순간 가난해졌다

     

부자가 되어야겠다고 바둥대 본 적은 없다. 존존히 아끼면 그런대로 살 수 있겠다는 희망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부자였다. 가리봉동 철길 옆에서 시작하여 오류동의 방 두 개짜리 전셋집으로, 이젠 ‘넘사벽’이 되어버린 강남 한복판에서 어엿한 집주인으로 살아도 봤고, 용인으로 내려온 이후에는 20여 년간 조금씩 평수를 늘려가면서 내내 넓고 깨끗한 집에서 살았으니 늘 부자였다. 어찌어찌 남들 부러워하는 데까지 올랐으니 출세라면 출세도 해봤다. 그러니 이래저래 나는 늘 부자였다.     


그런데, 그분의 축사를 들으면서 불현듯 내가 참 가난했고, 지금도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것, 가지고 싶었던 것, 베풀고 싶었던 것들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미루면서 살아왔고, 심지어 그런 것이 가난이란 것조차 모른 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에 대해서까지도 '세상을 위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을까' 하는 회의와 무력감이 함께 밀려왔다. 현실 자각과 그렇게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의감이 세차게 나의 뿌리를 흔들었다

     

10년도 더 된 차를 바꾸지 않는 것은 남의 이목을 초탈하였거나 청렴해서가 아니라 바꿀 돈이 여의치 못한 것이고,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골프는 필수라는 권유들을 번번이 뿌리친 것 역시도 지출 항목 한 가지가 더 늘어나는 것이 버겁게 생각된 때문이고, 매달 병아리 눈물만큼의 구호 성금을 끊지 않고 30년 가까이 이어온 것은 그저 내가 나에게 주는 위안이자 세상에 대한 면피에 불과한 것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나란 사람은 知足常樂(만족함을 알면 항상 즐겁다) 이란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만큼 현실 만족에 최적화된 반푼이 일 뿐이고, 통장의 잔고에 비례해 할 수 있는 일의 크기와 종류가 정해지고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 같은 건 애초부터 장착조차 되어있지 않은 ‘허당’ 일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무엇도 변변한 것 없는 나를 본 것 같아 갑자기 가난해졌다.     


그렇게 보름 남짓을 가난뱅이로 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해보니 태풍이 분 것도 아니고 지진이 난 것도 아닌데 수십 년 된 나무의 뿌리가 이렇게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 한심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였다. “이런 것이 혹시 ‘퇴직자 불안증후군’인가?”  ‘퇴직자 불안증후군.’ 그런 게 있는지 어쩐지 모르겠으나 흔들린 마음을 변명해줄 핑곗거리로는 제격이다.  


지역 의료보험료 올라갈 수 있으니 타던 차 그냥 타고, 영월의 텃밭이나 잘 가꿔야겠다. 위안과 면피 거리는 계속 필요할 테니 병아리 눈물만큼씩이지만 기부금은 내던 대로 내야겠지?  다 늦게 세상에 주눅 들지 않도록 더 센 바람이 불어오기 전에 들뜬 마음 꾹꾹 밟아 다져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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