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이용권

by 이윤구

갑자기 선물을 받았다. 누가 보낸 선물인지, 유효기간이 언제까지인지 알 수 없지만 매일 24시간을 온전히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 이용권이다. 받아도 남 눈치 볼 것 없고, 법에 걸릴 일도 없을 것 같아 두말없이 받았다. 늦잠을 자고,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글을 쓰고, 통화하고, 여행을 하고, 시골집에 다녀오고, 가끔은 친구들을 만나는 데도 쓴다. 써도 써도 줄지 않는 화수분 같다.


늘 시간이 부족했고, 항상 시간이 없었다. 뭔가 하여도 시간이 없었고, 하지 않아도 시간이 없었다. 걷는 것이 불안해 뛰어도, 자는 시간을 줄여봐도 시간은 늘 부족하였다. 어떻게 시간을 낼까 궁리하고 고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늘 쪼들리는 주머니 사정처럼 시간의 주머니도 비어있기 일쑤였다.


시간이 없으니 앞에서 꾸물거리는 것을 진득하니 참고 기다려주지 못했다. 출근길,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출발할 기미가 안 보이는 앞차를 보고 있노라면 금시에 초록빛 마음이 붉게 바뀌었다. 직진할 거면서 우회전 차선을 막고 서 있는 차라도 볼라치면 순식간에 치미는 부아와 함께 절로 경적에 손이 갔다.


마치 다른 놈이 제 영역 안에 들어오면 영락없이 성을 내는 까치처럼 잠깐이라도 누가 내 시간 안으로 불쑥 뛰어들면 인생의 궤도가 틀어지는 것 같아 노심초사하고 쉽게 달아오르곤 하였다. 일상이 늘 그런 식이었다. 그렇게 수십 년을 시간에 쫓기고, 시간과 다투며, 시간을 벌기 위해 사생결단을 벌이듯 살아왔다.


그렇듯 가장 바쁘고, 가장 시간이 없고, 그래서 가장 가난해졌을 무렵 갑작스럽게 고장 난 기차처럼 멈춰 서게 되었다. 중간 기착지도 목적지도 아닌, 선로 어디쯤인가에서 갑작스럽게 멈춰 선 것이다. 내가 멈춰 서면서 지금까지의 시간도 함께 멈춰버렸다. 망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드디어 쉬지 않고 돌아가는 시간의 무한궤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멈춰 선 그때 주어진 것이 자유 이용권이다.


이제 내일을 가불 하기 위해 포장도 뜯어보지 못한 오늘을 저당 잡히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가불 한 시간을 갚기 위해 오늘을 쓰지 않아도 되고, '먼 훗날'이라는 복권을 사지 않아도 되고, 느린 걸음을 걸어도 된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오늘을 살기에 넉넉하게 된 것이다.


'진짜 부자는 돈을 벌기 위해 일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사람'이란 글을 본 적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살 수 없다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돈이 많은 사람'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짜 부자'는 못 된다는 말로 이해를 했었다. 멈춰 선 내게 매일 24시간을 내 뜻대로 쓸 수 있는 무제한 자유이용권이 주어졌고, 나는 그것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부자가 된 것이다.


유효기간이 언제까지인지는 모르겠다. 영원한 보증이란 없으니 언제 사용 정지가 될지 알 수 없다. 그때까지는 시간을 벌기 위해 바둥댔던 시간들이 가장 가난했던 시간들이었음을 생각하면서 가끔은 주저앉아 발밑 이름 모를 들꽃들에게도, 오래 만나지 못한 친구들에게도 내 시간을 나눠줄 것이다. 조금 느리고 게으르게 내게 주어진 자유 이용권을 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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