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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May 23. 2022

기적을 꿈꾸며 맨발 걷기

누구나 한 번쯤은 기적을 꿈꾼다. 많은 꿈과 기원과 소망이 허황하고 대부분이 이루어질 수 없는 줄을 알면서도 꿈꾸고 소망한다. 나도 뭔가 기적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내 도전 과제는 맨발 걷기다. 코로나가 남긴 후유증 탓인지 치료가 끝난 지 달포가 넘어서도 기침이 계속되고 체중까지 줄어 나름 특단의 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맨발 걷기다. 삐걱대는 몸과 떨어진 체력을 맨발 걷기로 되찾아 보겠다는 조금은 엉뚱하지만 야심 찬 과제다.


새벽 5시 15분, 절로 눈이 떠졌다. 현직에 있을 때나 비슷한 시간이다. 퇴직 후 한동안은 시도 때도 없이 자고, 7시가 넘어서 깨는 게 보통이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해가 길어지면서 창밖이 훤하다. 따뜻한 물 한 컵을 마시고 연하게 탄 감잎차를 한 병 챙겨 문을 나선다. 


선득한 새벽 공기가 몸의 움직임에 따라 금세 상쾌한 기운으로 바뀐다. 등산로 초입에서 두 손을 모아 산에 인사를 올린 다음 신발과 양말을 벗는다. 정상까지 갔다 오는데 두 시간이면 넉넉한 거리지만, 길이 제법 거칠어 맨발로 걷기가 만만치는 않다. 매일 반복하기 위해서는 제법 분발심이 필요하다.        


벌써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 꼭두새벽부터 맨발로 걷는 것이 신기해 보이는지, 혹은 무모해 보이는지 더러는 힐끗 쳐다보고, 더러는 두런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음 발 자리를 찾기 바쁘다.   

  

팔각정을 지나 내리막길 오른편에 봉삼 꽃 한 송이가 산중의 왕이라도 되는 양 당당하게 서 있다. 꼿꼿하게 선 꽃대도, 넓고 짙푸른 잎도 어느 것 하나 뺄 것 없이 닮고 싶은 위용이다. 십여 년을 수도 없이 이 길을 오갔는데 봉삼 꽃을 만난 건 처음이다. 올해 처음 핀 것도 아니련만 어떻게 이제야 눈이 맞은 것인지 신기하다. 둘러보니 주변에 봉삼이 지천이다. 행복한 사람은 그냥 스쳐버리는 것이 없다는데, 십 년 넘게 안 보이던 것이 보이는 걸 보니 내가 조금씩 행복해지고 있는가 보다.      


오늘로 엿새째 석성산 정상에 맨발 자국을 찍고 왔다. 날마다 공기 좋은 숲길을 걸으니 그것만으로도 몸이 변하는 느낌이다. 기분 좋은 얼얼함이 땅의 기운인 양 발바닥을 통해 들어와 헛헛한 심신을 꽉 채운다. 믿음을 가지고 걷다 보면 몸이 변하고 치유의 기적을 만날 수 있음을 믿기로 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의 고비도 거뜬히 넘겼으니 쭉 잘 될 거라는 자신감도 생긴다.

      

맨발로 숲길을 걷는 것은 고행(苦行)이고 선(禪)이다. 뾰족한 나뭇가지나, 낙엽 밑에 숨어있던 돌부리, 혹은 밤 가시에라도 찔리면 아프다. 발바닥에 티눈이라도 박혀있고 발에 병이라도 있으면 선뜻 맨발을 내딛기가 두렵다. 잠깐이야 어찌 견디겠지만 한 시간, 두 시간 거친 산길을 걷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까딱 방심이라도 하면 상처가 나기 십상이다. 한 발짝 앞에 눈길과 마음을 고정해야 하는 행선(行禪)이다.     


그 통증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발바닥이 다음 자리를 찾는 데 익숙해지면 그때부터 즐거운 고행이 시작된다. 고통스럽기만 했던 통증과 얼얼함은 입맛 당기는 숙성된 매운맛이 된다. 두렵기만 하던 돌부리는 발바닥을 지압하는 멋진 도구가 된다. 솔잎 깔린 길이라도 만나면 푹신하고 부드러운 양탄자 위를 걷는 호사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소 등뼈처럼 울퉁불퉁 드러난 나무뿌리를 보면 꾹꾹 눌러 밟아 발바닥을 자극하는 여유가 생긴다.  

  

맨발로 걸은 지는 햇수로 10년이 넘는다. 가끔 생각나면 한 번씩 걷는 정도였으니까 ‘꾸준히’ 보다는 ‘간헐적’으로 해왔단 말이 적절하다. 그러다 보니 무슨 효험을 체험했다거나 기대할 정도는 되지 못한다. 다만, 명맥은 이어왔으니 완전 생짜는 아니다. 특히, 2년 전쯤에는 순전히 맨발 걷기를 염두에 두고 파상풍 주사까지 맞았으니 의지와 준비만은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한다.


기왕 하는 거 제대로 알고 해 보려고 책도 두 권을 사 읽었다. 두 권 다 서울의 대모산에서「맨발 걷기 숲길 힐링스쿨」을 운영하고 있는 박동창 님의 저서인데, 맨발 걷기의 효과와 원리와 함께 맨발 걷기로 건강을 되찾은 사람들의 경험담이 실려 있어서 작심(作心)을 신념으로 바꾸는데 제격이었다. 조만간 대모산에도 찾아가 보고 걷기도 꾸준히 해서 책 속 사람들의 기적 같은 치유 경험들을 직접 체험하겠다는 의욕이 생겼다.          


엿새, 아직은 눈에 띄는 변화가 있는 건 아니다, 매일 두 시간 이상, 두 달은 해야 극적인 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하니 엿새 만에 변화 운운하는 것이 성마른 일이긴 하다. 다만 고통스럽게 얼얼하고 매운 느낌이 기분 좋은 매운맛으로 바뀌고, 발바닥에 눈이 달린 듯 다음 자리를 찾는 데 거침이 없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생각해 보면 맨발로 걸으면서 이미 여러 기적을 체험하고 있다. ‘하늘을 날고 바다 위를 걷는 게 기적이 아니고, 두 발로 땅 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라는 중국 속담에 견주어 보면 맨발로 산길을 걷고, 닮고 싶은 봉삼 꽃을 만나고, 작심삼일의 고비를 수월하게 넘기고, 얼얼한 통증을 겁내지 않게 되고, 즐거이 내일 새벽의 산행을 기다리게 된 것 모두가 엄연한 기적이다.

      

‘숲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들꽃을 만나기 시작할 때, 인간은 자연스러운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맨발로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속도가 줄자 그동안 놓쳤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10년 넘게 보지 못 하고 지나쳤던 봉삼 꽃들이 눈에 들어온 것은 어쩌면 치유가 시작된 증표일 수 있다.

 

맨발, 그 가벼움 그 자연스러움 그 자유로움으로 나만의 기적을 만들고 싶다. 조금 느리게 걸으면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보고, 듣지 못했던 것들을 듣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면서 일상을 기적으로 만들고 싶다.   

  

(덧붙임) 맨발로 걷다가 뾰족한 돌부리를 밟거나 밤 가시에라도 찔리면 순식간에 아프다는 각성이 일어난다. 평소 감각이 무디거나 삶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꼭 맨발로 숲길을 걸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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