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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May 18. 2022

퇴직 후 두 달을 보내면서

- 잊혀지는 것에 대하여 -

한동안 집안에 틀어박힌 채 지냈다. 일주일간의 코로나 격리가 끝나자 이번에는 후유증 탓인지 며칠 동안 심하게 앓았고, 또 며칠 동안은 무슨 말인지도 모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강의』를 붙들고 씨름하였다. 보름 가까이 자연스럽게 칩거 아닌 칩거가 됐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퇴직 후 두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나갔다. 

     

아픈 거야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굳이 어려운 책을 고집스럽게 읽은 것은 어쩌면 이제 그만 칩거를 끝내라는 지킬박사에게 칩거를 이어갈 이유를 그럴듯하게 설득하기 위해 하이드가 찾아낸 제법 적당한 구실 거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두문불출하다가 몸도 어느 정도 회복되고, ‘계속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날 다 저녁에 산에 올랐다.      


산길 초입에 들어서는 순간 아카시 향기가 짙은 안개처럼 밀려왔다. 농밀했다. 꿀의 바다에 잠긴 느낌이라고나 할까. 바다를 가득 채운 푸른 물처럼 5월의 대기를 가득 메운 아카시 꿀 향기의 바다에 잠겼다. 연두색 같기도 하고, 그보다는 조금 진한 엷은 초록색 같기도 하고, 부드럽고 하얀 아이스크림 같기도 한 향기였다. 그렇게 봄의 절정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 이틀 후에는 금산을 거쳐 대전과 세종과 청주를 다녀왔다. 하루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다. 처음 만나는 사람도 있었고, 낯이 익어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생각만 해도 그립고 반가운 묵은 인연들도 있었다. 몇몇은 목적이 있어서 만났고, 몇몇은 보고 싶어서 부러 찾아가 만났다. 묵은 인연들과는 만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있는 운명적 만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하이드의 속삭임을 뿌리치고 문밖에 발을 내딛는 순간, 끊겼던 삶의 스토리가 이어지고 새로운 막이 열리고 다시 가슴이 뛰었다. 시간이 가면서 때때로 은자(隱者)가 된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퇴직 후 해보고 싶었던 것들, 가고 싶었던 곳 등에 대한 열망이 조금씩 수그러들고 무시로 울리던 전화벨 소리도 뜸해지면서 산중 수도자가 된 듯하기도 하고, 추수가 끝난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잊힌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갑자기 주어진 많은 시간과 무한한 자유와 무위(無爲)가 외려 밖으로 나가려는 나를 가로막고는 한다. 나도 모르게 쪼그라든 마음은 동굴 속에 숨어 은자연(隱者然) 하라고 속삭인다. 속삭임은 낮지만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밖으로 나가 누군가를 만나는 것보다, 세상을 몸으로 체험하기보다 유익할 것 없는 독서를 핑계로 삼고, 읽어주는 이 별로 없는 글쓰기를 방패로 삼아 자신을 동굴 속에 가두려 한다.    

 

진작에 내려놓았어야 할 것들에 대한 미련 때문일 수도 있고, 어느새 무용(無用)과 불위(不爲)의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자격지심 탓일 수도 있고, 어쩌면 열정을 불태운 뒤에 남은 재처럼 되어버린 무력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쨌든 퇴직 두 달 만에 웅크릴 곳을 찾는 나를 보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다행히 아직은 자연인도 은자도 꿈꾸지 않는다. 동굴의 유혹이, 문 안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힘이 아무리 강해도 문밖으로 나가고, 추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백 척 장대 꼭대기에서 한 발짝을 더 내디뎌보고 싶다. 동굴 속 은자가 아니라 세상을 유영(遊泳)하는 여행자로 살면서 5월이면 다시 아카시아 꿀 향기의 바다에 빠져보고, 그리운 사람들을 다시 만나 ‘만나야 될 사람은 만나게 되어있는 운명적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퇴직 후 두 달, 조금 흔들리고 있지만 바람이 불어야 향기가 멀리 닿는다는 것을 알기에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누군가를 쉬 잊는 만큼 누군가에게 쉬 잊힐 수 있다는 것 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바람과 파도에 흔들리며 나아가는 작은 배처럼 때때로 흔들리며 가슴 뛰게 할 내 꿈을 찾기로 했다.

      

오늘, 난생처음으로 불암산 암벽 위에 총총히 발자국을 찍고 왔다. 종일 혼자서 뿌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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