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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Jun 12. 2022

어디 비법 같은 것 없을까요?

- 나의 병력(病歷)과 치유 탐색기 -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은 편이었다. 감기는 달고 사는 편이었고, 고등학생 시절에는 폐결핵을 앓기도 했다. 생긴 것 멀쩡하고 달리기면 달리기, 축구면 축구 등 운동도 남 못지않아 강건해 보였지만 실상은 강건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직장생활 중에는 줄곧 지긋지긋한 체증에 시달렸다. 삼십 대에는 심한 중이염으로 2년 넘게 고생을 했다. 5년 전에는 왼쪽 얼굴의 구안와사로 한동안 심신이 움츠러드는 경험을 했고, 3년 전에는 오른쪽 안면의 3차 신경통으로 출산의 통증보다도 하다는 통증도 겪어봤다.     

 

아프지 않고 괴롭지 않은 병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내게 제일 괴로운 것은 잦은 체증이었다. 남들은 약을 먹거나 손가락 끝을 따주면 낫는다는데 내겐 그게 통하지 않았다. 한 번 체하면 어떤 약도 치료도 무효했다. ㅁ복통보다 두통이 문제였는데, 온갖 소화제에 진통제까지 용량을 초과해 먹어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은 좀체 사그라들지 않았다.  한 번 시작된 두통은 꼬박 하루 이상 지나야 겨우 잦아들었다.

  

자주 체하다 보니 손가락을 따기 위해 아예 100개들이 사혈침을 통째 사다 놓고 썼을 정도였다. 체할 때마다 휴지 몇 장이 시뻘게지도록 피를 내도 도무지 차도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또 손가락을 찌르곤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체하다 보니 참는 데는 이골이 났다. 회사에서 체한 날은 일도 일이거니와 아픈 표를 내는 게 싫어서 죽을힘을 다해 참곤 했다. 그나마 집에서 체한 날은 마음껏 아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낑낑 신음도 낼 수 있고, 손가락 발가락도 마음대로 딸 수 있었으니까.  

   

삼사 년 전부터는 주로 주말에 체증이 찾아왔다. 금요일 낮까지 괜찮다가도 늦은 밤이나 토요일 새벽이면 시름시름 몸살 기운과 함께 체증이 찾아왔다. 일요일에도 오후에는 출근을 했는데, 체증이란 놈은 내 출근 시간까지 감안해서 찾아왔다. 하루를 꼬박 앓고 일요일 오전쯤 되면 그럭저럭 운신할 만큼 회복되곤 했다.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그러다 보니 주말에 무얼 할 수도, 어딜 가는 것도 여의치 않을 때가 많았다. 고통스러운 가운데도 그 하루가 얼마나 아까웠던지....... 과식을 하거나 폭식을 해서 체하는 것도 아니어서, 억지로라도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려는 무의식의 자구책이란 생각이 들곤 했다.      


감기든 뭐든 병이 나면 체증과 매한가지로 길게 가고 모질게 아프곤 했다. 코로나만 해도 감기몸살 앓듯 지나가거나 걸린 줄도 모르게 끝이 났다는 사람도 적지 않던데 나는 이제껏 앓아본 적이 없는 관절 통증과 근육통을 겪은 것은 물론이고, 두 달 가까이 꽁지 빠진 수탉처럼 기력을 못 찾고 기침을 해 대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철이 들면서부터 유난스러울 정도로 건강과 관련된 책을 즐겨보고, 무슨 무슨 요법 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의학 원론, 동의보감, 식사와 체질, 혈자리와 침술 관련 책, 인체구조와 각종 수기요법을 비롯한 대체의학 관련 서적 등등 수십 권은 족히 된다. 신문이나 방송에 건강 관련 기사나 프로그램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직접 경험해본 것만도 환부의 피를 빼는 사혈요법부터 손바닥으로 두드려서 기혈순환을 좋게 해 준다는 박타 요법, 피부 표면을 도구 등으로 긁어주는 괄사와 추마 요법, 굽은 몸을 펴고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핵심인 몸살림운동, 발가락의 신경을 되살리는 것이 핵심인 스본 스도 요법 등등 부지기수이다. 서당 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는 말처럼 얼추 반풍수가 다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체질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때까지 내 체질을 소음인으로 믿고 살아왔다. 책과 인터넷을 뒤져서 내 생긴 모양과 성격과 잦은 병증 등을 대입해서 스스로 진단을 내리고, 그리 믿고 살아온 것이니 정확한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상체보다는 하체가 실한 편인 데다 대략 균형이 잡혀 있고, 얼굴은 작고 오밀조밀하고, 남 앞에 나서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소화 기능도 약해 툭하면 체하는 등 어슷비슷 소음 체질에 가까워 보여 그리 믿고 살아왔다.     


그렇게 믿고 살다 보니 별반 가리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소음인에 좋다는 성질이 따뜻한 음식들을 챙겨 먹으려 했고, 더운 여름에도 냉수 대신 뜨거운 물과 찬물을 반씩 섞어 마시는 등 몸을 차갑게 하는 것들은 피해 온 편이었다. 운동도 땀을 많이 흘리면 해롭다 하여 심하게 뛰거나 힘쓰는 운동은 피해왔다. 그렇게 소음인으로 살았다.      


그런데, 얼마 전 누군가의 한 마디에 하루아침에 소양인으로 체질을 바꾸었다. 이때까지 소음인으로 믿고 살아온 체질을 갑자기 소양인으로 바꾼 것이다. 지인들과 함께 등산전문가 한 분을 모시고 산행 후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이런저런 얘기 중에 체질 얘기가 나왔는데, 그분이 내 체질은 소양인이라고 평가를 해주셨다. 체질에 대해 얼마나 식견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대화 내내 허투루 하는 말이 없고 여러 분야에 박식한 것이 체질 감별쯤은 일도 아닐 것 같은 믿음을 주는 분이라서 토 달지 않고 그냥 소양인이 되기로 하였다.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을 찾아보고 꼼꼼히 헤아려보니 내 체질이 정말 소양인 같기도 하였다. 보통 체격에 날씬한 편인 데다, 굼뜨지 않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대략 성실한 편이고, 무엇보다도 소화에 문제가 생기면 두통이 생기는 것이 여간 부합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소양인의 특징 중 하나가 튀어나온 이마라는데, 외가 쪽 식구들이 하나같이 이마가 튀어나온 편이어서 비록 내 이마가 튀어나오지는 않았어도 유전적인 상관관계가 상당할 것이라는 생각까지 더해져 확신으로 굳어져 갔다. 그렇게 창졸간 소양인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헛갈리고 모르겠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큼이나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끔 오지랖을 부릴 때도 있으니 그리 내성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선천적으로 술과 친하지는 않지만, 가끔 차가운 맥주 몇 잔을 마셔도 분해를 못 시켜서 괴로울 뿐이지 배탈이 난 적은 없다. 성질이 제일 차갑다는 메밀 음식이나 열이 극성한 매운 것을 먹어도 탈이 없는 것을 보면 소음도 소양도 의심스럽다. 체형도 헛갈리기는 마찬가지다. 대략 균형이 잡혀 있을 뿐 상체든 하체든 두드러지게 우월한 것이 없다. 성격도 체형도 똑 부러지게 두드러진 것이 없으니 누군가 한마디 하면 솔깃해지곤 한다. 이렇듯 별 것 아닌 것을 붙들고 생각이 많은 것을 보면 소음인이 틀림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남 말에 쉽게 솔깃하는 것을 보면 소양인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좀 한심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여태껏 무슨 음식이 제 몸에 맞는지도 모른 채 살아온 무심함이고, 누군가의 한마디에 쉽게 흔들리는 정도의 마음밖에 갖지 못한 허접함이다. 인생을 좀 더 단단하고 여물게 살았으면 소음인이든 소양인이든 따질 일도 아니련만, 요 며칠 나는 밥상 앞에서 무엇을 먹어야 할지 먹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편식가가 되고 만 것이다.    

  

요즘 새롭게 시작한 것이 맨발 걷기다. 오늘까지 이십 며칠째 빠지는 날 없이 해오고 있다. 퇴직 후 무언가를 지속할 수 있는 여건이 되면서 시작한 또 하나의 자발적 임상실험이라고나 할까. 직접적으로는 두 달 가까이 계속된 코로나 후유증을 이겨 내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해낸 것이 맨발 걷기였다. 우리 몸이 땅에 닿는 순간 - 이를 접지(接地, earthing)라고 한다 - 땅속 자유 전자들이 몸속으로 들어와 혈액의 점성을 낮춰 순환을 원활하게 해 주고, 인체의 모든 신경이 몰려있는 발바닥이 자동 지압되어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이론과 많은 체험사례들은 퍽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보통 하루 두 시간 정도를 맨발로 걷는다. 대개는 석성산 정상까지 갔다가 오지만, 땅과 접한 시간이 중요한 만큼 오래 걷되 굳이 정상을 고집하지는 않기로 했다.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 특별한 변화는 모르겠다. 다만 묘한 중독성을 느낀다. 해방감이다. 특히, 오후에 걷는 날은 종일 양말과 신발 속에 갇혀 있던 발이 흙바닥을 디디는 순간 막 강물에 풀려난 어항 속 물고기처럼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느낀다. 발가락 열 개가 열 마리 물고기가 되어 힘차게 자맥질을 한다. 해방감과 동시에 의식 대부분이 발바닥과 발바닥 놓을 자리에 집중되면서 무념무상을 느낀다. 생각을 멈추는 것이 명상이라면 맨발 걷기는 그대로 명상이고, 작심삼일을 거뜬히 이겨내게 하는 힘이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내 몸을 치유할 비법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만병통치약도 비법도 보지 못했다. 물론 내 경험 밖의 세상을 알 수는 없지만, 적잖게 시험해보고 체험해본 바로는 그렇다. 그런 게 있다면 숨기려 해도 매일 떠오르는 태양처럼 자연 도드라지게 빛이 났을 것이다. 물론 부분적으로 효과를 본 것들이 없지는 않다. 몸살림운동으로 고질적인 어깨 통증을 고친 후 10년 넘게 재발 없이 지내고 있고, 오른쪽 엉덩이부터 종아리까지 찌릿찌릿하던 좌골신경통 증상도 단 한 번의 수기치료로 말끔해진 믿지 못할 경험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요법들이 다른 병증에도 효과적일지,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작용하는지는 모르겠다.     


온갖 치료법과 비방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더러 놀라운 효과가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가지에 너무 현혹되거나 전적으로 의지할 것은 아닌 것 같다. 병이든 사달이든 넘침과 모자람이 가장 큰 원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영양도 몸이 필요한 정도를 넘치거나 부족하면 독과 병의 원인이 되고, 운동도 일도 신경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체질이라는 것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대를 물려오면서 여러 체질들이 마치 비빔밥처럼 섞여 만들어진 것이 나일진 데 두부모 자르듯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하는 것이 맞는지도 의심스럽거니와, 설사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에 맞춰 먹고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다양한 종류의 재료들이 섞여 누가 먹어도 탈이 없는 비빔밥처럼 조화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면 선천적인 체질에 크게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 나 또한 성씨가 각기 다른 여러 조상들의 피가 섞여서 만들어진 비빔밥 같은 존재인데 고추장이 조금 더 들어간들, 계란이 한 개 더 들어간들, 고사리가 한 줌 더 들어간들 그게 뭐 그리 대단하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아파보고 그 아픔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것저것 나름의 방법을 찾다 보니 ‘질병이야말로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고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지혜의 명약’(이병창, 몸의 심리학)이란 말이 그저 어떤 이의 현학이 아니라, 어렴풋하지만 구체적인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비법과 비방을 찾을 일이 아니라, 먼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고 생각을 바꿔야 몸이 바뀌고 삶이 바뀔 것임을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아! 그런데, 생각은 제법 반듯한데 오늘도 나는 좌고우면, 비법을 찾고 있다. 헛된 꿈을 꾸고 있다.‘맨발로 걷다 보면 어쩌면 우화등선(羽化登仙), 껍질을 찢고 나온 나비처럼 훨훨 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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