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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Jun 21. 2022

회색 줄무늬 들고양이

-  길이 들어버린 들고양이를 보고 -

이른 아침부터 석성산 초입 소공원의 철봉 옆 밤나무 아래에 회색 줄무늬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제법 덩치가 있고 건강해 보이는 녀석이다. 사람들이 오가도 본척만척 실눈을 가늘게 뜨고 웅크린 채 미동조차 없다. 사람이 제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깨우치고 있는 모양새다. 내가 바짝 다가가자 숲 속으로 5, 6미터쯤 물러나더니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앉는다. 문득 녀석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달쯤 전부터 석성산에 올 때마다 소공원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배낭을 내려놓곤 하는 밤나무 그루터기에 개 사료 같은 것이 한 움큼씩 놓여있고는 했다. 개 사료를 새 모이로 준단 말은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크기로 봐서도 적당하지 않고, 들개에게 먹이를 주는 경우는 더더구나 없기에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오늘 그루터기 옆에 웅크리고 있는 녀석을 본 순간 의문이 단번에 풀렸다. 그동안 누군가 녀석을 위해 사료를 가져다 놓았고, 사료에 익숙해진 녀석은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사료를 가져다주는 그 사람을 기다린게 틀림없다. 어제 종일 내린 비에 쫄쫄 굶었을 녀석은 날이 새자마자 밥자리에서 그이의 선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언제부터 녀석이 사료에 의지해 살고 있는지, 사료를 먹기 전과 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알지 못한다. 사료를 먹기 전에도 지금의 토실하고 건강한 모습이었는지, 아니면 보통의 길고양이들처럼 마르고 거친 털을 가진 녀석이었는지 또한 알 수 없다. 다만 너무나 익숙하고 당당하게 – 어쩌면 간절하게 - 누군가를 기다리는 녀석의 모습에서 야생의 삶을 포기하고 의존적인 삶에 길들어버린 ‘그저 그런’ 고양이 한 마리를 보았다.     


녀석이 들고양이의 습성을 버리고 사료에 길이 들기까지의 망설임이 어떠했을지는 짐작만 할 뿐이다. 맨 처음 사료를 입에 물었을 때, 그것이 야생의 본능을 포기할 만큼 강렬한 유혹이었는지, 그저 하루의 삶을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였는지는 나의 궁금증일 뿐이다. 쉽게 얻어지는 매일의 포만이 곧장 녀석의 행복으로 연결되곤 하는지, 비 오는 날의 기약 없는 기다림과 주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견뎌내는지 또한 공연한 나의 걱정이고 오지랖일 뿐임을 잘 알고 있다. 다만 먹이를 기다리는 녀석에게서 문득 내 모습을 본 것은 내 지나온 삶이 그 녀석의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삶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서부터 제도와 사람에 순응하고, 그 대가에 기대어 살아온 것이 야성을 버리고 누군가의 선의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의 삶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얼마쯤은 나를 버리고 무언가에 순응하여 대가를 얻었듯, 녀석 또한 생존이라는 엄중한 현실 앞에서 스스로 발톱을 자르고 이빨을 뽑아 ‘그저 그런’ 보통의 고양이가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서글픔과 함께 어떤 숙연함마저 느껴진다. 그렇게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음에 시간이 지나도 녀석의 웅크린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리는가 보다.      


순응의 시간이 끝나고 '퇴직'이라는 자유의 시간을 맞은 지 어느새 3개월이 다 돼간다. 더는 밥벌이와 안락을 위하여 나 자신을 숨기거나 포기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조심스럽고 여전히 주춤거리곤 한다. 몸에 밴 순응의 결과이자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최소한의 안전판을 확보해놓아야 한다는, ‘오버’ 하지 말라는 본능의 작용이다. 이런 즈음에 길들여진 회색 줄무늬 고양이를 만난 것은 서글프면서도 내게는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녀석의 결정을 비난하거나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녀석의 삶의 방식을 나무랄 생각도 없다. 다만 녀석이 버린 것, 포기한 것들을 보면서 오래전 내가 그랬던 것들을 다시 찾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다시는 지난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는 헛된 꿈은 꾸지 않기로 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장마를 예감하게 하는 날들이다. 길든 짧든 해마다 그냥 지나가는 법은 없었으니 올해도 어김없이 장마는 찾아올 것이다. 장마가 와도 녀석에게 선의를 베푸는 그이는 변함이 없을까, 혹여 비를 핑계로 발길을 끊는 것은 아닐까, 발길을 끊는다면 녀석은 어떻게 긴 장마의 하루하루를 견뎌낼까, 과연 주림이 한동안 잠들었던 녀석의 본능을 다시 깨워 줄까.......  


장마가 시작되기 전 녀석의 발톱과 이빨이 천둥처럼 다시 돋아나기를,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만 숨죽여 기다리는 서글픈 모습을 더는 볼 수 없기를 진심으로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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