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도 그물도 다 잃어버리고
- 애써 상처를 키운 열흘간의 병상일지(病床日誌) -
해망구실(蟹網俱失), 일거양득(一擧兩得)이나 일석이조(一石二鳥)와 반대로 게와 그물을 한꺼번에 잃는다는 뜻이다. 지나친 욕심 때문일 수도 있고, 어리석음 탓일 수도 있고, 순전히 운이나 재수가 없어 살짝 미끄러졌을 뿐인데 그럴 수도 있다. 게든 그물이든 어느 한쪽만 잃어도 속이 상하는데, 한꺼번에 둘을 다 잃어버린다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요 며칠 새 조그만 새끼 게 몇 마리를 챙기려다가 그물도 잃고, 다 잡은 대물 게마저 놓쳐버렸다. 놓친 게는 더 커 보이고, 잃어버린 그물은 아쉽기만 하다. 또다시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그물과 게를 모두 잃게 되었는지 지난 열흘간의 경과를 되짚어 본다.
지난 수요일, 몇몇 친구들과 강원도 평창에 간 김에 대학 동창이 운영하는 OO자연치유센터를 방문했다. 학과가 달라 생면부지지만 같은 학번의 동창이란 고리 하나로 점심을 같이 먹고 금세 말을 놓는 사이가 되었다. 기왕 온 김에 센터의 대표 치유 체험 코스인 효소 찜질을 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찜질장으로 향했다. 백사장에서 모래찜질을 하듯 자연 발효시킨 미강(米糠) 등 유익한 재료들로 가득 채운 대형 목조 발효조에 전신을 묻고 15분간 찜질을 하는데, 발효 미생물들과 발효과정에서 발생한 열 – 섭씨 70도 정도 – 이 심부의 체온을 올려서 혈행 개선과 면역력 강화 등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다.
발효조에 들어가 온몸을 묻으니 금세 후끈한 열기가 몰려왔다. 채 2, 3분도 지나지 않아 그만 포기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뜨거운 열기였다. 특히 양 손날과 양발 뒤꿈치와 복사뼈 아랫부분이 뜨겁다 못해 데인 듯 날카롭게 아파 왔다. 주인장에게 물으니, 평소 좋지 않았던 부분은 유독 뜨겁게 느껴지는데, 정 견디기 힘들면 밖으로 내놔도 되지만 참을 수 있으면 참아 보란다. 참는 데는 이골이 난데다, ‘뜨거워, 뜨거워’하면서도 잘들 참고 있는 친구들과 센터에 장기 투숙을 하면서 치유 목적으로 매일 두 번씩 찜질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을 보니 나만 유난을 떠는 것 같아 이를 악물고 15분을 견딘 후 발효조 밖으로 나왔다.
서늘한 산바람과 차가운 계곡물에 열기를 식히는데도 왼발 뒤꿈치 부위와 오른발 복사뼈 밑의 날카로운 통증이 잦아들 줄을 모른다. 아픈 두 곳에 커다랗게 물집이 잡혔다. 주인장은 평소 문제가 있던 부위에 요산이 고인 것이지 화상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란다. 자주 발목을 다치곤 했던 터라 그 말이 솔깃하게 들려 통증을 참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통증과 함께 부기까지 점점 심해져만 갔다.
목요일 아침, 상태가 나아질 기미가 전혀 없다. 병원부터 들렀어야 했는데, ‘화상과는 다르다’는 한마디를 부적처럼 부여잡고 시골집으로 향했다. 부모님과 하루를 보내고 금요일 저녁 무렵 집에 도착해 상처를 보니 물집이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고 넓어져 있다. 6시 저녁 식사 약속을 미룰까 하다가 발이 아파서 미뤄야겠다고 말하는 것이 궁색한 변명 같아 그냥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특히나 오늘 약속은 얼마 전부터 가까워진 후배의 뜻밖의 오해와 서운함을 풀어주기 위해 내가 먼저 제안한 자리인 만큼, 걸을 수 있는 상처 때문에 뒤로 미룬다는 것이 스스로 용납이 안 되었다. 병원에 들렀다 가게 되면 늦을 것 같아 행군이나 등산 중 잡힌 물집을 터트릴 때처럼 바늘에 실을 꿰어 물집을 터트린 다음 약속 장소로 나갔다.
물집에서 흘러내린 체액으로 점점 양말이 젖어오고, 한 모금 한 모금씩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마다 그에 비례해 상처가 커지고 통증도 곱절로 심해지는 느낌이었지만, 자칫 틀어질지도 모를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몸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보다 훨씬 화급하고 중한 일이라는 생각에 마셔서는 안 되는 술을 마셨다. 다행히 쌓였던 오해와 서운함은 풀었지만, 상처는 상처대로 숙취는 숙취대로 깊어졌다. 퉁퉁 붓고 욱신거리는 통증 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다.
토요일 아침, 별다른 치료 없이 방치한 때문인지 오른발 복사뼈 밑의 수포는 밤새 처음보다 두 배도 넘게 커졌다. 왼발 뒤꿈치의 물집 역시 제법 몸집을 불려 놓고 제 영역의 확장을 알리듯 끊임없이 통증 신호를 보냈다. 병원에 가야 한다는 몸의 절규를 무시하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양평에서 열린 생태탐방 행사 발대식에 참석했다가 곧바로 후배의 늦깎이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치료를 미룬 시간에 비례해 상처가 커지고 깊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후배와의 약속도, 음주도, 발대식과 결혼식 참석도 누가 대신할 수 없고 미룰 수도 없는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이었다고 애써 나 자신을 다독이고 위로하였다.
일요일 저녁 무렵부터 38도 가까이 치솟는 열에 잔뜩 긴장한 채 밤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개원 시간에 맞춰 병원에 갔다. 다행히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는 의사의 말에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곪은 살갗을 도려내고 화상 처치를 받았다. 오는 금요일부터 참가하기로 한 생태탐방 행사에는 부득이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고 통보했다. 무리를 해 볼까도 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참가하는 것이 오히려 폐가 될 것 같아 양해를 구하고 포기하는 쪽을 택하였다. 많은 사람과의 약속이었고 특히 아이들과의 약속이었는데 내 불찰로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되고 말았다. 미안하고 면목이 없다는 말만으로 넘길 수 없는 누를 끼치게 된 것이다. 순간순간 소중한 것들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그것들로 인해 정작 정말 소중한 것은 놓쳐버린 꼴이 돼버렸다. 작은 게 몇 마리에 정신이 팔려 그물이 떠내려가는 것도, 그물에 걸렸던 큰 게도 놓쳐버린 것이다.
이미 늦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나고 나면 무엇이 중요했었는지, 무엇을 우선순위의 앞에 혹은 뒤에 두어야 했었는지 깨닫게 된다. 지난 열흘, 무모하고 현명치 못한 날들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 순간과 그 사람들이 중요했었고, 그에 맞춰 최선을 다했던 것은 비난이나 책망받을 일은 아니다. 다만, 치료를 뒤로 미룬 채 챙겼던 것들이 내 몸을 희생할 만큼 가치가 있는 일들이었는지,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일과 바꿀 만한 것들이었는지, 그저 체면 때문은 아니었는지, 혹은 조금 유연해지고 가끔 꺾어도 되는 자존심과 무모한 오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맞는 것이라면, 이 열흘 나는 가을 도토리처럼 단단하게 여물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노랫말처럼, 자신을 사랑한다면 너무 아픈 상처와 통증은 참지도 키우지도 말 일이다. 아프면 인생 만사가 죄다 꼬일 수 있으니 병원부터 가고, 모르면 용감해지기 전에 용기 내어 물어보고, 맺힌 매듭은 술이 아니라 말과 마음으로 풀고, 혹여 체면이나 위신 때문에 억지로 좋은 표정을 짓고 있다면 이제부터는 사람 노릇 너무 잘하려 하지 말고, 배우고 느꼈으면 다시는 똑같은 실수와 어리석은 짓 되풀이하지 말 일이다.
그나저나 두 발이 다 곪도록 무던히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이 특별한 어리석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