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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Jul 03. 2022

장인(丈人)

- 회광반조(回光返照)를 기원하며 -

“칠십까지만 사는 게 딱 좋아, 더 오래 살아서 좋은 거 하나 없어.”   

   

척추 협착증 수술을 받고 열하루 만에 퇴원하신 장인을 모시고 처가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서해안고속도로 서평택 나들목 부근을 지날 때쯤 장인은 문득 회한 가득한 목소리로‘칠십 살까지만 사는 게 딱 좋다’는 말씀을,‘더 오래 살아서 좋은 거 하나 없다’는 말씀을 혼잣말처럼 되뇌셨다.   

   

열흘 넘게 입원해 계시면서 지난 팔십오 년 인생의 마디마디들을 꼼꼼히 돌아보고 들춰보고 곱씹은 결론이 그것이었나 보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병실에 보호자도 없이 혼자 누워 – 장인이 입원했던 병원은 코로나 감염 예방을 위해 보호자 없는 병실을 운영하고 있다 - 당신의 지나온 세월과 점점 더 쇠잔해 가는 심신에 의지해 살아내야 할 앞으로의 날들을 헤아려보았을 것이다. 그러고는 피할 길 없어 보이는 근근한 연명(延命)에의 막막함 앞에 무력하게 서 있는 자신의 환영(幻影)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아내와 부부의 연을 맺은 지 30년이 되었다. 그 30년간, 아름드리 솔처럼 당당했던 오십 중반의 장인은 이제 팔십이 훌쩍 넘은 노인이 되어 있다. 인디언 서머처럼 빛나는 순간이 없지 않았지만, 자력으로는 다시 일어서기 힘들 정도의 추락을 겪으며 꺾이셨고, 2, 3년 전부터는 무시로 찾아오는 크고 작은 병마에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을 드러내곤 하셨다. 고교 시절 축구선수로 뛰었던 건장하고 강건했던 청춘의 흔적은 더는 그 몸 어디 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 30년간 나는 때로는 안타깝게, 때로는 안쓰럽게 장인의 삶을 지켜보았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장인의 자조와 탄식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삶의 의지를 내려놓은 체념인지, 그럭저럭 생각과 몸이 의지대로 움직여주던 어느 시절의 끝자락쯤으로나마 돌아가고 싶은 난망한 소망의 에둘름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분의 인생에는 어쩌면 내가 지켜본 것,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애환과 고통의 응어리들이 깊숙이 박혀 있으리라 어림해 볼 뿐이다.     

 

반년 전쯤 장인은 정강이와 종아리의 염증으로 한참을 고생하셨다. 어느 날, 좀처럼 차도가 없는 병세와 감당하기 어려운 무력감에 지친 듯 혼잣말처럼 읊조리던 처연한 목소리가 생생하다.      


“이제 사는 게 너무 힘이 들어. 가만히 있어도 힘이 들어.......”      


살아있는 순간순간이 힘겨운 듯 맥을 느낄 수 없는 그 목소리에서 긴 여정의 고단함을 보았다. 그 풀리지 않은 고단함이 반년만에 늙은 호랑이의 애처로운 포효처럼 처연한 언어가 되어 튀어나온 것이리라. 삶에 대한 열정은 고사하고 남은 시간의 빈칸을 채울 마지막 재료마저 소진해버린 뒤끝의 진한 회한들이 슬픈 노래가 되어 나온 것이리라. 그 처연한 언어들을 이어 보고, 그 슬픈 노래를 읊조려보았다. 문득‘사는 게 너무 힘이 든다’는 말씀도 ‘오래 살아서 좋은 거 하나 없다’는 말씀도 어쩌면 삶에 대한 애착과의 단절이 아니라, 나락에서 벗어나고 싶은 절실한 구조요청이자 위로와 공감을 갈구하는 하소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원 사흘째,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많이 밝아지셨다. 수시로 병원에서 가르쳐준 재활운동을 하고 있다며 걱정하지 말란다. 아궁이 속 하얀 잿 무덤 속에 남아있던 불씨처럼, 소진해버린 열정의 잿 무덤 속에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몇 개쯤은 남아있는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전 내내 개었던 하늘에서 한바탕 소낙비가 쏟아졌다. 채 10분도 안 되는 짧은 동안 검은 구름은 비로 내리고, 남쪽 하늘에는 다시 파란 숨구멍이 열렸다. 후드득 쏟아지는 빗소리에 놀란 부겐베리아 꽃 몇 송이가 떨어졌다. 떨어진 꽃잎은 여전히 분홍빛이다. 떨어져서도 제 빛깔 그대로여서 처연하지도 쓸쓸하지도 않다.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가고, 하늘에는 파란 숨구멍이 열리고, 부겐베리아 꽃잎은 떨어져서도 여전히 분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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