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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Aug 11. 2022

퇴직자 삼계(三戒)

- 퇴직자가 경계해야 할 세 가지를 다시 생각함 -

퇴직을 하고 보니 내가 30년 넘게 쌓아온 경력과 경륜이라는 것이 별 쓸모가 없다는 것을 금세 알겠다. 실무적으로든 이론적으로든 내가 맡았던 분야에 대해 가지고 있던 지식과 역량, 자부심이라는 것이 사회에서는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먼저 퇴직한 선배나 동료들을 떠올려봐도 경륜과 경력을 살려 뭔가를 하는 경우를 찾기가 비 내리는 밤 별을 찾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걸 보면 나뿐 아니라 퇴직자라면 대부분이 직면하는 보편적인 현실 같기도 하다.


그런 현실 때문일까, 유독 지난 3월 치러진 제20대 대통령 선거판에 단기필마로 혹은 무리를 지어 뛰어든 선후배 퇴직자들이 적지 않았다.  A 등 몇 명이 여당 후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B 등은 야당 후보 캠프에 합류하였고, 색깔이 없던 C도 모 캠프에 합류했다는 둥 선거 기간 내내 퇴직자들의 대선판 투신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선거가 끝나자 이번에는 이긴 쪽에 참여했던 전직(前職)들이 일제히 논공행상에 뛰어들어 자천 타천으로 회사 고위직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그중 몇몇은 실제로 화려하게 복귀했다는 소식이 두문불출하고 있는 내게 까지 전해졌다. 그러그러한 저간의 소식들을 들으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구름처럼 일어났다가 짙은 안개처럼 오래도록 머릿속에 머물렀다.     


‘설마 무너진 굴 속에 갇혀있다가 용케 솟아날 구멍이라고 찾은 게 선거판은 아니었겠지. 잘만 되면 단번에 인생역전에다, 못돼도 딱히 잃을 것 없는 판이라는 얍삽한 계산만으로 뛰어들지는 않았을 거야.’      


‘못다 한 꿈과 포부를 펼쳐보기 위해서 한 선택이고 결단이겠지,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마음이 남달라서 그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려 하는 거겠지........’     


선거판에서의 일전과 이어진 전리품 분배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승리의 깃발을 거머쥐고 화려하게 복귀한 몇몇 전직들의 분투기를 전해 들으면서 문득 오래전 읽은 어느 신문의 칼럼 내용이 떠올랐다. 자세한 내용은 가뭇하지만 ‘퇴직자가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쯤으로 기억되는 칼럼이다.       

 

‘퇴직한 후에는 후배들에게 먼저 연락하지 말 것, 다니던 직장에 기대어 떡고물이라도 얻어볼까 기웃거리지 말 것, 재직 때 모든 일을 내가 했다고 떠벌리지 말 것’ 정도였던 것 같다.   

   

앞의 두 가지는 기억이 선명한 편인데 나머지 한 가지는 긴가민가하다. 어쨌든 퇴직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후배들을 이용하려 하거나, 몸담고 있던 조직에 빌붙으려 하지 말고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살아보라는 취지의 칼럼이었던 것 같다.     

 

그 칼럼을 읽을 당시만 해도 선후배 간 위계질서가 엄연하고 회사 역시 위세가 살아있던 때라 퇴직 선배들이 툭하면 현직 후배들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싫어도, 다소 무리가 되어도 차마 뿌리칠 수 없어 부탁인지 청탁인지 모를 것들을 들어주는 것이 후배들의 도리처럼 여겨지기도 했던 때였다.      


그런 행태들을 겪어서 그런지 그 칼럼이 유난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고, 나중 퇴직해서 전직(前職)이 되면 꼭 유념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던 생각이 난다. 그것이 선배로서 구차함을 면하고 후배들을 위하는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대선 후 화려하게 귀환한 이들에 대한 구설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반갑고 희망적인 소식이면 좋으련만, 재직 때 5년마다 들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레퍼토리가 현직 후배들의 걱정과 볼멘소리와 뒤엉켜 들려온다.  


변화의 시기에는 항상 많은 말들이 떠도는 법이고 다 믿을 것이 못 되긴 하지만,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했던 선배들의 귀환에 대해 환호와 축하는 고사하고 '올드보이의 귀환'이니, '깃발의 색깔만 바뀌었다'느니 하는 말들이 들려오는 걸 보면 걱정되는 바가 없지 않다. 그래서 언제 읽었는지도 잊어버린 옛 칼럼이 생각난 것이다.

    

열정과 충정이야 탓할 바가 아니지만, 제발 후배들에게, 그리고 밖에서 말없이 성공을 기원하며 지켜보는 이들에게 혹여라도 구설로 오르내리는 까닭이 무엇인지 헤아려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난주 내내 트럼프 행정부 초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맥매스터의 《배틀 그라운드》를 읽었다. 많은 혼란과 난제 속에서도 미국이 미국으로 존속할 수 있는 것은 의욕과 공명심을 한참 뛰어넘는 빼어난 역량과 함께 어제와 내일을 두루 아우르는 통찰을 갖춘 이들이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꼈다.

      

나야 거친 세상을 향해 출사표를 던질 용기도 없고, 치열하게 싸워서 무엇을 쟁취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는 사람이지만, 기왕 중책을 맡아 복귀한 사람들은 꼭 품었던 뜻과 포부를 바르게 펼쳐주기를 기원해본다. 입신의 뜻이야 이미 이룬 것이나 매한가지니 양명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못돼도 ‘다니던 직장에 기대어 떡고물이라도 얻어볼까 기웃거린 선배’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5년 후면 내 나이 62살, 그때 설마 내 안의 변변찮은 우국충정이 어느 놀음판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도 인간사 혹시 모르니 그때까지 퇴직자가 경계해야 할 세 가지, 일명‘퇴직자 삼계(三戒)’로 튼튼한 고삐를 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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