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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Apr 11. 2022

이력서를 쓰다

이력서를 써보았다. 퇴직을 열흘 앞에 두고 ‘취업을 목적으로 학력, 경력 등의 정보를 작성하여 회사 등에 제출하는 문서’인 이력서를 써보았다. 


내 오십 수년 인생이 한 장의 종이 안에 오롯이 갈무리되었다. 아니, 그 한 장을 채우기가 벅찼다. 말과 글로 풀면 몇 날 밤을 새워도 부족할 것 같은 내 일생의 기록이, 한 편의 영화로는 절대 담을 수 없어 16부작 미니시리즈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은 내 살아온 날들의 모든 것들이 단 한 장의 서식을 채우기에도 역부족이다. 

    

이미 4개월 전 퇴직 날짜를 받아놓고도 앞으로 무엇을 해야겠다는 어렴풋한 계획조차도 세우지 못한 채 세월만 보내고 있는 참인데 후배로부터 지인이 경영하는 회사의 자문위원을 해볼 의향이 있느냐는 전화가 왔다. 각계의 퇴직자 예닐곱을 영입하여 자문그룹을 운영할 계획이고, 그중 한 명으로 나를 추천하였단다. 한 달에 한두 번 회의에 참석하는 외 속칭 ‘대관업무’에 대한 염려는 안 해도 된다고 안심을 준다. 그러면서 이력서 한 통만 보내달란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도 있고,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을 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승낙을 하고 인생 최초의 이력서를 썼다. 인적사항을 적은 다음 경력을 적으려니 대학 졸업 후 30여 년 인생이 딱 다섯 줄로 갈무리가 되었다. 소대장 경력까지 써넣었는데도 다섯 줄을 적고 나니 더는 적을 것이 없다. 군 전역과 함께 입사한 현 직장을 평생직장으로 생각하고 살아왔기에 당연한 것이라고, 부끄러워하거나 아쉬워할 일이 아니라고 자위하면서도 그동안의 인생이 너무 단조로웠던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퇴직한 선배들을 만날 때마다 듣는 이야기가 있었다. “직장 일이 전부가 아니다. 퇴직 전에 미리미리 퇴직 이후의 인생을 준비해라. 나와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면 그때는 이미 늦는다......”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은 말이지만, 하루하루 순간순간 닥치는 일을 핑계로, 지나고 나면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희미해지는 잡다한 것들을 이유로 퇴직 이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준비한 것이 없다. 퇴직이 임박한 지금도 ‘닥치면 살아가는 수가 있겠지’ 하는 막연함에 기대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궁리하고 모색한 것이 전혀 없다. 


그런데, 막상 무언가를 제안받고 이력서를 써보니 지난 세월에 대한 대차대조표와 미래에 대한 견적서를 한꺼번에 받아 든 느낌이다. 인적사항과 학․경력, 자격 등을 적은 한 장의 종이에 내 지나온 삶의 대차대조표가 명확히 드러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나와 앞으로의 나를 평가하고 견적을 내는 것이 과히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30년은 ‘계단 오르기’였다. 한 단 한 단 올라 마지막에 누가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가느냐가 성공의 기준이었다. 실패의 기준 역시 단순했다. 남들보다 뒤처지면 실패로 여겨졌다. 사람마다의 다름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누가 높이 올라가느냐와 먼저 올라가느냐가 유일한 기준이었다. 옆을 돌아보는 것, 밑을 내려다보는 것은 자칫 경주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그렇게 삼십여 년을 살아왔다. 마치 철로를 달리는 열차처럼 한 번도 궤도를 벗어나 보지 못한 채, 오로지 계단을 빨리, 높이 오르기 위해 살아왔다.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가장 현실성 없는 가정임을 잘 안다. 그럼에도 이력서를 쓰면서 든 생각 중 하나가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이었다. 다시 살 수 있다 해도 이력서의 빈칸을 지금보다 화려하게 채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만, 바람 가운데 서더라도 좀 더 다채로운 이야기들로 빈칸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최소한 궤도 위의 인생은 사양하고 싶다. 가정은 가정일 뿐, 지금은 이미 살아온 날들의 성취로 이력서의 빈칸을 채워야 한다. 그렇게 짧은 이력서를 써서 보냈다.    

 

곧 퇴직이다. ‘자기소개서’를 써 볼 생각이다. 한 장의 대차대조표로 표현하지 못한 나를 상세히 기록해볼 작정이다. 부끄러움은 부끄러움 대로 적어볼 것이다. 56살의 자소서. 쓰다 보면 기억 어딘가에 조각조각 묻어두었던 명암들이 드러나고 정리가 되겠지. 적다 보면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도 보다 명료해지겠지. 


오늘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이 불안하다면 이력서를 써볼 일이다. 갈피를 잃은 삶을 이끌어줄 길잡이별이 필요하고, 막막한 여정의 등대가 필요한 때라면 내 지난 시간의 궤적부터 정면으로 마주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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