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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Apr 11. 2022

당근마켓

시간이 많아지면서 추가된 소소한 일상 중 하나가 당근마켓을 둘러보는 것이다. 딱히 무엇을 사려는 것도 아니고, 팔 것도 없다. 그냥 동네 사람들의 세상살이가 함박눈 쌓이듯 켜켜이 쌓이고, 물건 하나하나에 모르는 이들의 말 못 할 사연들이 숨어있는 것 같아 소설을 읽듯, 드라마를 보듯 들여다보곤 한다.     


그 속사정들이야 딱히 알 방도는 없다. 소설을 읽을 때 마냥 내 멋대로 그려보고 맞춰볼 뿐이다. “이거는 애지중지 아끼던 물건 같은데 왜 팔려고 할까? 이 사람은 왜 이 가격에 내놨을까? 이건 어디에 쓰는 물건이지? 그런데, 이런 걸 사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어떤 문장을 보아도 생각과 의문이 꼬리를 무는 것을 보면 홍미진진한 소설이고 다큐멘터리임에 틀림이 없다.

     

“판매자 : 달님아빠,  물품명 : 그라폰 인튜이션 만년필(280,000원). 19년도에 구매하였습니다.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육체노동을 시작해서 보관하던 소장품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계속 보관할까 고민하면서 올립니다. 만년필을 좋아하시는 분이 구매하셨으면 합니다.” 


2월 중순경부터 매물로 나온 것인데 오늘 아침까지도 안 팔린 채로 있다. 달님아빠는 애장하고 있던 만년필을 죄다 내놓았었는데 값이 싼 녀석들은 다 팔리고 이 녀석만 아직껏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시세에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사연이 눈길을 잡고, 그이의 망설임이 마음을 잡는다. 나이는 얼마나 됐을까? 회사생활은 왜 정리했을까? 정년이 되셨나, 잘렸나? 어느 회사를 다녔길래 만년필을 몇 개씩이나 소장하고 썼을까? 육체노동을 한다는데 무슨 일을 하는 걸까? 굳이 육체노동일까?....... 떠오르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J88. 용돈이 부족해서ㅜ 오늘내일 안에 제 게시물에 있는 것 아무거나 구매해주시면 덤 짱 많이 드려요...... 네고도 해드려요...... 3000원 이상부터...... 제가 지금 급돈이라ㅜ 많은 연락 주세요. 진짜 덤 많이 챙겨드려요.”(물품 : BTS 미개봉 향수! 8,000원, 뱀파이어 시스터 소설책 1~9권 일괄 30,000원. 에눌 불가. 가격 잘 안 내리니 내릴 때까지 기다리지 마시고 챗 주세요 등등)  


이 녀석(본인을 학생이라고 소개), 돈이 얼마나 다급하면 이러나? 어디에 쓰려는 거지? 용돈을 얼마나 받길래......? 어찌 됐거나 잘 팔려서 마른 지갑이 해갈되었으면 좋겠다.   


이 소설을 볼 때마다 놀라는 것 중 하나가 다양함이다. 이렇게 다양한 물건들이 모두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었나? 품명을 봐서는 뭣에 쓰는 것인지 가늠이 안 되는 것들도 적지 않다. 함께 올린 사진을 봐도 짐작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PS4+타이틀 3개(180,000원). 사용량 적었습니다. 타이틀은 레데이 2. 갓 오브 워 위닝 2020 3개입니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 디렉터 스컷(50,000원)” 등등 


순식간에 나를 지진아로 만드는 수수께끼 같은 단어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니니 굳이 알 필요 없지'하며 외면해 보지만 나는 일정 부분 문명의 지진아임이 분명하다!   

  

설이나 추석 등 명절이 지나고 나면 홍삼 등 건강보조식품류와 참치, 햄, 식용유 등의 선물세트가 쏟아져 나온다. 이거는 원인과 결과, 스토리가 빤한 삼류소설이다. 그래도 쳐다보게 되는 건 혹여 건강보조식품 중에 만병통치약이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그리고 참 착한 가격 때문이다. 이 시장 물건들 대부분이 본디 제 값에 비해 턱없이 싸지만, 명절 끝에 나온 선물세트 역시 참 저렴하다. 햄과 참치를 좋아한다면 모아서 다음 명절 때까지 부지런히 먹어도 되겠다!    

 

개중에는 나의 기준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많다. “〔가격 내림〕발렌시아가 운동화 트리플 S Gray(380,000원). 783,090원에 판매하는 발렌시아가를 380,000원에 팝니다. 실착용 5회 이내로, 아낀다고 잘 신지 못하고 다녀 아쉽지만 판매합니다.” 무슨 운동화가 78만 원이나 하고, 중고 가격이 38만 원이나 하는지. 이걸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아끼느라 잘 신지도 못한 것을 왜 팔려고 하는지...... 


 천만 원을 훌쩍 넘는 자전거, 100만 원 가까이하는 중고 만년필, 잎사귀 한 장에 몇만 원을 호가하는 희귀 화초...... 이런 녀석들을 볼 때면 그동안 세상의 한쪽만을 보고 살아왔음을 새삼 느낀다. 내 이웃의 풍요로움을 느낀다. 천만 원짜리 자전거는 굴러가지 않고 날아다니나, 비싼 만년필에서는 명문장이 절로 나오나....... 우리 동네 한편에도 나와 다른 세상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 세상과 달리 또 다른 한쪽 편은 참 따뜻하다. 알을 품고 있는 암탉의 가슴처럼 포근하다. “단행본. 나눔♡. 저희 애들 재밌게 읽었던 책들인데 가져가실 분~^^”,  자전거 나눔 합니다. 군대 가기 전 쓰던 건데 전역하고 안 써서 나눕니다.......” 드물지 않게 눈에 띄는 무료 나눔과 싼값에 새 주인을 기다리는 물건들을 보면 따뜻하다. 이들은 부자 되기는 글렀다. 가난한 부자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 당근마켓이 좋다.  

    

물건뿐 만이 아니다동네 생활’ 코너에는 더 따뜻하고 코끝 찡하고 먹먹하고, 외로운 단편들이 수도 없다


 "하늘소라. 같이 마라탕 먹을 사람 구해요. 제가 20대라 20대분이셨으면 좋겠어요. 성별은 크게 상관 안 해요” “Keeepp. 저 마라탕 킬러입니다. 같이 먹어용”     


“살살이. 언X동. 닭이 며칠째 있네요. 어디서 도망쳐 나온 건지...... 위치는 청X동 사진 근처입니다. 닭이 밥은 먹었는지....... 집 찾아갔으면 좋겠어요.”      


“꽃과들. 전라도가 고향이라 엄마의 김치 맛이 그립습니다.(이제 아프셔요) 고춧가루 안 아끼고 팍팍 양념 부으시던 엄마 손맛....... 근처 전라도 맛 비슷한 김치 판매하는 곳 추천요.”  

   

“푸른당근. 식물 잘 아시는 분 저희 애기 좀 살려주세용. 선물 받은 화분인데 식물이 죽어가요. 물 많이 주면 안 된다고 해서 많이 안 줬는데 그래서 그런 걸까요? 괜히 물 줬다가 죽을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요. 얘 왜 이런가요?”     


  때로는 손 내밀고 싶고 달려가고 싶다. 나는 이런 소소함이 좋다. 그래서 오늘도 당근마켓에 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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