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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Apr 11. 2022

노트북 카메라 자전거

- 퇴직 후의 생활을 위한 세 가지 준비물 -

“있는 카메라나 잘 써보셔.” 단박에 퇴짜를 맞았다. 

퇴직 후 꿈꾸던 삶을 위하여 꼭 갖고 싶은, 아니 꼭 갖춰야 될성싶은 것들의 목록을 꼽아 보았다. 딱 세 가지면 될 것 같았다.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해 줄 괜찮은 카메라 한대와 글이라도 쓰고 찍은 사진들을 갈무리할 노트북 컴퓨터, 그리고 나의 지평을 넓혀줄 자전거 한 대.     

 

'30년 동안 한 눈 안 팔고 열심히 살아왔으니 이 정도는 뭐라 않겠지' 자신하며 아내에게 목록을 내밀었다. “카메라는 애들 쓰던 것 두 대나 있으니까 있는 거나 잘 써 보셔. 노트북은 알아서 사고, 자전거는 퇴직이나 하고 나서 사든 지 말든지 해.” 


'어, 이게 아닌데......' 예상이 빗나갔다. 식물도감 뺨치는 야생화부터 방방곡곡의 멋진 풍광이며 삶의 향기와 땀 냄새 진하게 밴 사람살이까지 멋지게 담아보고 싶은 소망은 휴대폰 카메라나 애들 쓰던 카메라로 만족을 해야 할 것 같다. 자전거는 말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반승낙은 했지만 흔쾌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노트북은 태클을 안 걸었으니 그게 어디야, 물론 한 푼도 안 보태고 알아서 사라는 것이기는 하지만. 

    

마음 변하기 전에 일단 허락한 것부터 사기로 하고 노트북을 주문했다. 온전히 나를 위해 산 물건 중 가장 비싼 것이다. 할부를 긁으면서도 기분이 좋다. 오십몇 년 동안 가슴에 쌓인 말들이 서로 먼저 써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 같다. 당장이라도 자판을 두드리면 책 한 권쯤은 바로 써질 듯한 기분이다. 나의 글과 사진들로 512기가 저장용량이 금세 차고 넘칠 것만 같았다. 이 맛에, 이런 기분 때문에 쇼핑을 하는 건가?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특히 풍경이나 꽃을 찍는 것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산과 들, 길섶, 심지어 도심의 보도블록 틈새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나 지천이지만 누구에게나 다 제 모습을 나투지 않는 들꽃과 풀꽃들을 좋아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그네들을 만나는 것이 즐겁다. 무릎 꿇고,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려 자세히 보아야 비로소 낯을 드는 그네들을 찍는 것이 즐겁다. 그래서 성능 좋은 카메라는 언제나의 로망이었는데, 휴대폰 카메라의 성능이 일취월장 좋아지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오래전 읽은 김훈의 『자전거 기행』이 자전거에 대한 꿈을 갖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용은 가물가물 하지만, 아직도 그 책을 생각하면 허벅지와 종아리가 뻑뻑해지곤 한다.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외할아버지께서 사주신 우체부 자전거가 중고등학교 6년간 발이 되고 친구가 되어 주었다. 대학교 4학년 겨울, 혼자서 시골집에서 서울까지 그 자전거를 탔다. 한겨울 준비 없이 나선 무모한 길이었다. 나중 거리를 재어보니 182킬로미터, 450리 길이었다. 종일을 달려 어찌어찌 서울에 도착은 했지만, 다시 타고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친구와 이별을 했다. 이제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싶다. 함께 바람을 가르고, 같이 햇살을 뚫고 떠돌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당근 마켓을 유심히 살핀다.     


오늘도 발이 되고 동반자가 되어줄 멋진 친구와 곳곳 때때의 이야기들 찾아 떠나는 꿈을 꾼다. 멋진 카메라가 아니라도 멋진 사진을 찍고, 처처의 사는 이야기들을 담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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