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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Apr 11. 2022

산길을 걸으며

이른 아침, 석성산을 향해 집을 나섰다. 해가 산봉우리를 넘어오기 전이라서인지 사람들의 소리도, 봄꽃들의 수런거림도 아직은 희미하다. 언제나처럼 산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고 두 손을 모아 산의 정령께 인사를 올린다.  

    

유장한 물길을 닮은 초입 숲길을 지나 송전탑 근처에 이르니 갑자기 세상이 분주해진다.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루주를 짙게 바른 바람난 진달래’가 어서 오라 연분홍 입술을 내민다. 노란 물방울 원피스 한껏 차려입은 생강나무는 다디단 봄내를 풍긴다. 현호색 가는 줄기 위에는 어느새 멧비둘기 몇 마리가 내려앉았다. 조용한 왁자지껄함이 제대로 봄이다. 

     

길에서 살짝 벗어나 현호색 군락이 있는 계곡 쪽으로 들어섰다. 수줍은 듯 몸을 낮춘 현호색들과 눈 맞춤 중인데 뒤처져 올라오던 오십 남짓 여자분이 기다시피 하면서 내 쪽으로 온다. ‘길을 놔두고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 무슨 일인가 싶어서 “이쪽은 길이 아닌데요” 했더니 “이쪽으로 올라가셔서 길인 줄 알고......” 말끝을 흐린다. 초행길이냐 물으니 몇 년 전 한 번 와본 적이 있단다. 길을 가르쳐주고 내쳐 현호색이며 생강나무며 올 괴불 꽃까지 눈에 띄는 대로 설명을 해주었다. 눈 쌓인 길이 아니라도 앞서 걸을 때는 오랑캐 걸음을 걷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겠다. 생각 없이 또는 맹목으로 내 발자국을 따라오는 이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 여인을 뒤로하고 중턱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다 보니 연두색 점퍼에 군청색 야구모자의 키다리 청년이 점점 가까워진다. 걸음새가 영 엉성하다. 마른 몸에 달라붙어 휘청이는 다리가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내쳐 앞서려는데 갑자기 “안녕하세요?” 인사가 뒤통수를 친다.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초원이를 닮은 어눌한 발음으로 보아 사람들과 섞이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데 먼저 인사를 한다. “네~” 짧은 대답을 하면서도 불의의 일격을 당한 기분이 든다. 부끄러움 한 움큼이 뭉실 피어오른다.


낯 모르는 이에게 먼저 인사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쑥스럽고 계면쩍어서 선뜻 못 하고, 내키지 않아 못하고, 귀찮아질까 봐서 안 한다. 그런데 ‘사람들과 섞이기가 쉽지 않아 보일 것’ 같은, '초원이의 목소리를 닮은' 키다리 청년이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이다. 당신이 나보다 나은 게 무어냐고, 보이는 것만으로 평가하려 하고, 교만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점잖케 힐난을 하는 것 같다.

      

민망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그 부끄러움에서 도망이라도 하듯 서둘러 정상에 올랐다. 하얀 안개에 잠긴 용인 시내와 에버랜드가 있는 둔전 쪽은 늦은 잠을 자는 듯 고즈넉해 보인다. 정상 정자에는 밤새 맨살로 한기를 견딘 온도계가 햇살에 언 몸을 녹이며 힘겹게 수은을 밀어 올리는 중이고, 칠십 전후의 남녀 어르신 두 분은 밤새 뻣뻣해진 관절과 근육들을 사방으로 늘리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기쁜 하루 보내세요.”

백발인지 금발인지 모르게 머리를 염색하고 스무 살 처녀 아이 같은 차림으로 몸을 풀던 여자분이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맞인사와 함께 유난히 인사하는 사람이 많은 아침이란 생각을 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하산을 하려는데 어느새 그분이 앞장을 서 있다. 


“안녕하세요? 기쁜 하루 보내세요.” 

마주치는 이들에게 예외 없이 인사를 안긴다. 더러는 잘 아는 사이인지 반갑게 맞인사를 한다. 어떤 이는 마지못한 듯 우물거리고, 더러는 그냥 지나친다. 반응과 상관없이 만나는 사람에게 빠짐없이 ‘기쁜 하루’를 선물한다. 오지랖이 보통은 넘는 분이란 생각을 하며 뒤를 따랐다. 걸음걸이가 다람쥐처럼 재고 경쾌하다. 


“걸음이 참 빠르시네요”

 “제가 좀 빠르죠?, 산에 다니기 시작한 지 1년 8개월이 됐는데, 산에 다니면서부터 먹던 약도 다 끊었어요. 근데 제가 몇 살처럼 보여요?”

 “스물일곱?”,

“하하, 내가 젊어 보이긴 하죠?”


말은 말을 끌어내는 마술을 부린다. 그렇게 시작해서 내려오는 1시간 내내 말을 받고 말을 주었다. 지난했던 예순여덟 삶의 자서전을 육성으로 들었다. 나 아니면 죽는다던 둘째 오빠의 친구는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 그 남편은 죽는 날까지 의처증을 못 버렸고, 당뇨로 18년을 투병하였단다. 지치고 힘이 들어 죽을 생각도 여러 번 했지만 세 딸을 키우면서 열녀 효부처럼 살았단다. 남편을 보내고 등산을 시작하였고, 6개월 전부터는 모델 일을 시작했단다. 살아온 날들이 지옥 불을 통과하는 것 같았지만 산을 다니면서 건강을 되찾았고, 모델 일을 하면서 자신을 발견하였고, 봉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지금, 행복하단다.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떤 꽃을 보는 것보다 경이롭다. 그리고 사람의 향기는 어떤 향수보다 오래 기억된다. 모진 겨울을 꿋꿋하게 견뎌내고 인생이라는 런웨이를 힘차게 걷고 있는 그분을 보면서 절망하고 좌절하지 않는다면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는 법이란 생각을 했다. 언뜻 그녀가 바위틈 현호색과 루주 짙게 바른 진달래와 진한 꿀을 머금은 생강나무를 합쳐 놓은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우연한 만남들을 곰곰 생각해본다. 오늘 아침에 만난 낯선 인연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내 걸음을 바르게 할 것이고, 작지만 큰 부끄러움을 기억할 것이고, 인생의 절정에 도달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결코 없다는 것을 떠올릴 것이다.      


4월 2일 아침, 노란 물방울 원피스로 멋을 부린 생강나무도, 분홍 입술의 진달래도, 수줍은 현호색도,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올괴불나무 꽃도 제각기 제 빛깔대로 고왔다. 해와 함께 완연한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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