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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Apr 11. 2022

파상풍 주사는 맞은 거요?

“이봐요?” 

“네, 어르신.” 

“파상풍 주사는 맞은 거요?”     


 이태 전쯤의 일이다. 뒷산 등산로를 맨발로 걷고 있는데 칠순이 훌쩍 넘어 보이는 어르신이 나를 불러 세워서는 조심스럽게 물으시는 것이었다. 혹여 맨발로 걷다가 돌부리에라도 걸리거나 뭔가에 찔려 상처가 나면 파상풍에 걸릴 수도 있음을 염려해서 물으시는 것 같았다. 주사를 안 맞았다고 하면 말이 길어질 수도 있겠다 싶어서 맞았다고 대답을 하고는 형식적인 감사 인사와 함께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 어르신의 목소리가 희미해지기도 전에 내 걸음을 앞질러 온 부끄러움이 얼굴을 화끈 달구었다. 잠깐의 번거로운 상황을 벗어나려고 어르신의 걱정스러운 눈빛과 염려의 목소리를 쉬 무시해 버린 치졸함이 부끄러움이 되어 마음도 발걸음도 무겁게 짓눌렀다. 이태가 넘게 지난 지금도 어르신을 만났던 그 숲길을 걸을 때면 그 어르신의 모습과 그때의 부끄러움이 되살아난다. 진심을 한갓 ‘오지랖’으로 받아들인 협량(狹量)이 쉬 지원지지 않는 부끄러움이 된 것이다.     


‘고독의 시대’라고들 한다. 이웃과의 교류는 말할 것도 없고 한집에 사는 식구끼리 관계가 단절된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남보다 앞서야 하고 강해야 한다는 강박이 팽배한 문밖의 사정 역시 나을 것이 없다. 스마트폰이 유일한 소통의 대상이자 창구가 되고, ‘반려’라는 타이틀을 꿰찬 개, 고양이, 심지어는 식물들이 중요한 소통의 대상이 된 시대가 되었다. 거래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친절은 간계를 숨긴 가면쯤으로 치부된다. 하물며 낯선 이의 이유 없는 친절은 경계심을 증폭한다. 불신은 잘라내도 다시 자라는 사슴뿔처럼 새로운 뿔을 내밀고 민들레 홀씨처럼 쉬 번진다. 사람을 한갓 도량이 좁은 짐승으로 만든다.     


그 경험 이후 두 번 오지랖을 부린 적이 있다. 비슷한 장소에서 한번, 그리고 얼마 전 팔공산 갓바위를 오르면서 한 번. 


“파상풍 주사는 맞으셨어요?” 맨발의 그네들에게 어르신이 내게 물었던 말을 똑같이 건넸다. 주제넘은 짓이 아닐까 주저되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을 하는 것은 누군가의 선의를 입은 사람의 최소한의 양심이고 의무라는 생각에 작은 용기를 냈다. 


그 한마디를 건네면서 알게 되었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그네의 눈빛에서 노인의 행동은 용기와 측은지심과 겸손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산길을 함께 걸으며 낯선 내게 살아온 내력을 풀어내는 그네들을 보며 진심을 벼려 만든 한마디 말이 잠긴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것도 깨달았다.       


가끔은 빚을 진 것은 없는지 헤아려볼 일이다. 때로는 길거리에서, 때로는 시장에서 나도 모르게 진 빚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남보다 높이 올라가는 것이 일생의 목표라면 내가 누군가의 어깨를 밟고 올라서 있는 것은 아닌지 살필 일이다. 남보다 많이 가지는 것이 삶의 목표라면 오로지 누군가의 주머니에 있는 것을 끝끝내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내 가방에 옮겨놓으려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일이다.  

    

그날 이후 다시 그 어르신을 뵌 적은 없다. 다시 뵐 수 있다면 그때 감사했다는 인사와 함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부끄러움은 스스로 용서하고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리고 곧바로 파상풍 주사를 맞았다고 말씀드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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