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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리스 Jul 07. 2022

아빠는 정말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사셨을까

곧 일흔, 아직도 소년 같은 아빠를 생각하며

40년이 넘게 결혼 생활을 하고 계신 우리 아빠와 엄마는 비슷한 점을 찾으래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매우 다른 분들이다. 엄마는 초저녁만 되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새벽형 인간이시고, 자주 찾지는 않으시지만 고기 요리를 맛있게 드시며, 자녀와 신앙생활을 기쁨으로 아는 모범생이시다. 반면 아빠는 엄마가 주무시고 난 뒤에도 밤늦게까지 유튜브 시청과 독서를 즐기시는 저녁형 인간이시고, 어떤 요리보다도 된장찌개와 푸성귀가 세상에서 좋은, 하고 싶은 취미는 일단 해야 하는 자유인이시다. 자신의 삶은 뒤에 두고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인내와 희생의 아이콘인 엄마와 대비되어, 우리 집에서 아빠는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사는 소년 같은 사람’의 포지션을 수십 년째 굳건히 지키고 있다.


우리 아빠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산다’고 평가받는 첫 번째 이유. 아빠는 얼리어답터이다.

손재주가 유독 좋은 아빠는 기계에 관심이 많은 ‘공대남’이다. 집 안의 고장 난 물건들을 뚝딱뚝딱 손쉽게 고쳐내는 것을 넘어, 기성 전자제품을 본인 입맛에 맞게 리폼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이시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새로 나온 전자제품을 꼭 써봐야 직성이 풀리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아빠의 전자제품은 PDA폰. PDA폰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대충 설명하자면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잠시 사용되었던 ‘휴대전화+초소형 컴퓨터’ 정도라고 말하면 될 듯하다. 현재의 스마트폰에는 비할 바가 못되지만, 그래도 작은 펜을 가지고 터치스크린을 콕콕 찍어가며 인터넷, 메모, 문서작성 등을 할 수 있는 폰이었다. 당시 아빠는 PDA폰을 두 개 구입하여 하나는 아빠가 쓰시고, 다른 하나는 갓 모 전자회사의 신입사원이 된 나에게 선물을 하셨었다. 그리고 나는 그 PDA폰 때문에 회사 사람들에게 “그건 뭐냐”, “한 번 구경해도 되냐”, “왜 벽돌을 들고 다니냐”, “우리 회사에서 나온 최신형 폰으로 바꿔라” 등등 수많은 관심을 받아야만 했다. 여하튼, 50대가 가까운 나이에 남들보다 한 발 먼저 PDA폰을 사용하셨던 우리 아빠야말로 진정한 얼리어덥터가 아닌가? 지금도 얼리어덥터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어서, 우리 집에서 최신형 휴대폰을 구경하려면 아빠 것을 구경하면 된다. 그리고 그 휴대폰에는 자식들도 잘하지 않는 다양한 SNS 어플들이 깔려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우리 아빠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산다’고 평가받는 두 번째 이유. 아빠는 취미 부자이다.

아빠는 거의 20년째 취미로 색소폰을 연주하신다. 그것도 매우 꾸준히, 열심히, 집중해서 말이다. 취미 악기로 구입하기에는 매우 비싸 보이는 가격대의 색소폰과 반주기를 구입하셔서 매일 같이 연주 연습을 하신다. 회사에 다니시던 때는 회사 지하공간 한편을 색소폰 연주실로 꾸며 매일 아침 연습을 하실 정도의 열정을 보이시기도 했고, 교회에서 색소폰 동호회를 만들어 초심자들을 가르치기도 하셨다. 수영을 배워 접영까지 마스터하신 적도 있고, 하이킹을 다니시기도 하고, 학창 시절 친구분들과 가끔 여행을 다니시기도 한다. 하나의 취미를 가지기도 힘든 요즘, 여러 개의 취미를 다양하게 즐기시는 우리 아빠야말로 즐거운 인생을 사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아빠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산다’고 평가받는 마지막 이유. 아빠는 갖고 싶은 것이 명확하고, 당당히 요구하신다.

“엄마, 생신선물로 뭐 받고 싶으세요?”라고 여쭈면 항상 돌아오는 대답은 같다. “갖고 싶은 것 딱히 없는데, 그냥 용돈으로 줘.”가 바로 그거다. 반면 “아빠, 생신선물로 뭐 받고 싶으세요?”라고 여쭈면 다양한 대답이 돌아온다. “버버리 목도리가 필요해” 혹은 “명품 지갑이 갖고 싶네.” 등등.

몇 해 전 아빠가 생신선물로 콕 집은 명품 지갑을 사러 갔을 때의 일이다. 언니가 얼마 전 봤던 버버리 지갑이 괜찮은 것 같다고 해서 버버리 매장을 찾았더랬다. 중년 어른이 쓰시기 좋아 보이는 적당한 가격대의 지갑을 골라 막 구입을 하려다가 왠지 모를 불안감에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 지금 버버리에서 반지갑을 사려고 해요. 괜찮으시죠?”라고. 그러나 아빠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버버리 말고 루이뷔통 지갑이 좋아. 버클 없이 반으로 접히는 얇은 반지갑이었으면 좋겠다.” 헐, 이렇게 명확한 요구사항이 있었을 줄이야. 역시 우리 아빠답다 싶었다. 우리는 바로 매장을 옮겨 ‘버클이 없이 반으로 접히는 얇은 루이뷔통 반지갑’을 선물로 구입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사셔서인지, 아니면 천성이 그렇게 타고난 것인지 우리 아빠는 일흔을 앞둔 연세에도 굉장히 젊어 보이시고 소년 같으시다. 언니와 내가 어릴 때에는 친구 같은 아빠였고, 지금은 손자 손녀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신다. 거의 쉰 살 넘게 차이나는 손자 손녀들과 스스럼없이 몸으로 놀아주시고, 한 시간 넘게 영상통화를 하며 수다를 떨 수 있을 정도이니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남들의 눈치와 상관없이 하고 싶은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시고, 지루한 것은 참지 못하고, 늘 새로운 것을 찾는 분이 바로 우리 아빠다.




그런데, 아빠는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사셨을까?


아빠는 평범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돌아가신 지가 오래되어 내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친할아버지는 매우 엄한 분이셨다고 한다. 전형적인 옛날 아버지 상이라고 해야 할까? 아빠가 중학생 무렵 나팔바지가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나 보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지만 아빠는 나팔바지를 너무 입어보고 싶었고, 친할머니는 그런 아들을 위해 쌈짓돈을 모아 나팔바지를 선물로 사주셨다고 한다. 최신 유행 아이템을 드디어 손에 넣게 된 아빠는 분명 하늘을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나팔바지를 산 바로 그날 친할아버지에게 나팔바지의 존재를 들켜버렸고, 아빠는 단 한 번도 나팔바지를 입고 외출하지 못했다고 한다. 친할아버지가 쓸데없는 겉멋만 부린다며 나팔바지를 다 찢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빠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라며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해주셨지만,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장남으로 자라며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을 어린 아빠의 모습이 그려져 이야기를 듣는 내 마음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아빠의 삶은 그 후에도 녹록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친할머니와 동생 셋, 그리고 새로 생긴 가족을 건사해야만 했던 것이다. 친할머니는 느긋한 성격에 생활력이 그다지 강한 스타일은 아니셔서, 사실상 모든 생활은 아빠(그리고 엄마)가 책임져야 했을 것이다. 없는 살림을 쪼개고 쪼개 동생들을 대학까지 공부시켜 사회에서 한 자리씩 하게 만들어낸 것이 우리 아빠다. 언니와 내가 학자금 대출 하나 없이 용돈을 받으며 대학생활을 마칠 수 있도록 해주신 것도 우리 아빠다. 4년만 다녀도 지겹고 도망가고 싶은 것이 회사인데, 아빠는 가족을 위해 한 회사에서 40년 이상을 꾸준히 근무하셨다. 정년퇴직을 하신 후에도 자회사에서 추가로 근무하시며 계속해서 일을 하셨고, 지금도 자격증을 가지고 가끔씩 아르바이트를 다니신다. 내가 회사를 다녀보니, 단 한 번도 업무가 힘들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내색을 하지 않으셨던 아빠가 정말 대단하게 느껴진다. 아빠도 지겹고 싫은 순간이 있으셨을 텐데, 다른 일을 해보고도 싶으셨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아빠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사신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다 하신 후 남는 시간들을 하고 싶은 것들로 애써 채우시며 삶을 버텨오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가 솜씨를 발휘해 차리신 밥상


요즘도 아빠는 즐거워 보인다. 퇴직 후 넉넉해진 시간을 그동안 정말 하고 싶었던 것들로 채우고 계시는 듯하다. 엄마를 위해 요리도 하시고, 혼자 지내고 계시는 친할머니를 만나러 가시기도 하시고, 여전히 색소폰과 하이킹을 즐기시면서 말이다. 아빠도 이제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살짝 내려놓고, 나팔바지를 입고 뽐내고 싶었던 소년의 마음으로 돌아가 자신만의 행복을 더 열심히 찾아가셨으면 좋겠다.


아빠, 곧 일흔이지만, 여전히 소년 같은 아빠의 삶을 응원합니다. 혹시 나팔바지가 지금도 입고 싶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둘째 딸이 사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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