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02
매거진 <요리하는 아재 박주부>
입맛이 없는 날이 있다.
배가 고픈 건 분명한데, 뭘 먹고 싶은지 모르겠는 날. 냉장고를 열어도 아무것도 당기지 않고, 배달 앱을 켜도 스크롤만 올렸다 내렸다 하다가 그냥 닫아버리는 날. 몸이 지쳐 있거나, 마음이 무거울 때 유독 그렇다. 그런 날 나는 배추를 꺼낸다.
배추는 참 과소평가된 채소다. 김치의 재료로는 익숙하지만, 그 자체로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배추만큼 솔직한 채소가 없다. 95%가 수분이라 칼로리 걱정이 없고, 열을 가해도 비타민C가 꿋꿋이 살아남는다. 강한 척하지 않아도 알고 보면 단단한 것들이 있는데, 배추가 딱 그렇다.
오늘은 배추를 쪄낼 것이다. 복잡하게 썰거나 볶거나 할 필요 없다. 그냥, 찌면 된다.
찜 솥에 물을 올리는 동안 재료를 준비한다.
배추속대를 가지런히 정리해 솥에 담는다. 배추의 노란 속잎은 여리고 부드럽다. 이 부드러움이 쪄지면 더 깊어진다는 걸, 몇 번 해보고 나서야 알았다.
15분. 그 사이에 소스를 만든다.
마늘, 대파, 홍피망, 청피망, 청양고추를 잘게 다진다. 도마 위에서 칼질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린다. 칼질은 이상하게 마음을 가라앉힌다. 복잡한 생각들이 도마 위에서 잘게 썰리는 느낌이랄까. 다진 채소들을 그릇에 담고 진간장 두 큰 술, 굴소스 한 큰 술, 알룰로스 한 큰 술, 물과 식초를 넣고 섞는다. 여기에 고추기름을 두 큰 술 더한다. 고추기름은 미리 만들어두면 두고두고 쓸 수 있다. 식용유에 대파와 생강을 넣고 천천히 달구다가, 고춧가루가 갈색빛으로 변하면 면포에 곱게 거르면 된다. 번거로운 것 같아도 한 번만 해두면 그다음부터는 요리가 훨씬 수월해진다.
찜기 뚜껑을 열었을 때 올라오는 수증기가 얼굴에 닿는다.
배추가 반투명하게 익어 있다. 살짝 눌러보면 부드럽게 들어간다. 접시에 옮겨 담고, 만들어둔 소스를 넉넉히 뿌린다. 데친 숙주를 곁들인다. 숙주의 아삭함이 부드러운 배추와 대비를 이루며 식감을 살려준다.
완성된 그릇을 보면 생각보다 예쁘다. 연한 노랑 위에 빨강과 초록, 그 위로 기름기 도는 소스가 윤기 있게 번진다. 밥상 위에 올려놓으면 꽤 그럴싸하다. 숟가락을 들고 한 점 집어 입에 넣는다. 새콤하고, 매콤하고, 깊은 감칠맛이 순서대로 밀려온다. 입맛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젓가락질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렇다. 입맛은 달아난 게 아니었다. 그냥 자극이 부족했던 것이다.
가끔 몸이 원하는 건 거창한 보양식이 아니다.
새콤한 것 하나, 매콤한 것 하나.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것 하나. 배추찜은 딱 그 자리를 채워준다. 당뇨가 있어도, 나트륨을 신경 써야 해도, 소스 재료들을 잘 조합하면 맛은 하나도 양보하지 않아도 된다.
배추찜 레시피 (3인분)
<재료>
배추속대 350g · 숙주 100g · 마늘 10g · 대파 10g · 홍피망 50g · 청피망 50g · 청양고추 5g
<소스>
진간장 2큰술 · 굴소스 1큰술 · 알룰로스 1큰술 · 물 1/3컵 · 식초 1/2컵 · 고추기름 2큰술
고추기름: 고춧가루 1큰술 · 식용유 100mL · 대파 20g · 생강 10g
배추찜
1. 배추를 가지런히 담아 찜 솥에 15분 정도 찐다
2. 마늘, 대파, 홍피망, 청피망, 청양고추를 잘게 다진다
3. 다진 채소와 소스 재료를 골고루 섞는다
4. 찐 배추를 접시에 담고 소스를 뿌린다
5. 숙주를 데쳐 곁들인다
고추기름
1. 식용유를 100 정도로 데운다
2. 대파는 10cm로, 생강은 편으로 썬다
3. 데운 기름에 대파, 생강, 고춧가루를 넣고 고춧가루가 갈색이 될 때까지 끓인다
4. 면포에 기름을 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