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끝의 완벽한 조연, 처치스

주인공은 나, 조연은 처치스

by Asparagus



나의 모교는 도쿄 오모테산도 근처에 있었다.

강의 전후로, 혹은 아무 할 일 없는 오후에 나는 종종 오모테산도를 배회했다.


그 거리 메인 스트리트 한켠, 에르메스 매장 옆에 처치스가 있었다.

그 위치는 꽤나 많은 사람들의 욕망과 기대, 그리고 지불 의사를 상징하는 자리였다.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생각했다.

“영국 신사 구두점 같네.”


한두 번 봤다면 잊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신사 구두는 이상하게도 나를 따라다녔다.

유명 편집숍마다 어김없이 진열돼 있었고,

그 단정한 얼굴은 마치

내 검색 기록을 훔쳐본 알고리즘처럼

계속해서 시야에 걸렸다.


그렇지만 그 시절의 나는

신사적인 무드와는 꽤나 먼 취향이었고,

처치스의 신사구두는

아직 내 인생에 등장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


어느 날 문득,
로퍼가 갖고 싶어졌다.


노브랜드부터 하이엔드까지,

나는 로퍼 사냥에 나섰다.


그러다가 일본의 유명 사진작가,

**시토 레이(シトウレイ)**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많이 걷고, 많이 움직여야 하는 직업 특성상

평소엔 편한 신발을 신지만,


아주 잘 해내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을 때는

꼭 처치스 로퍼를 신고 집을 나선다고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날의 결과는 늘 좋았다고.


오랜만에 마주친 이름.

반가움이 지나가자

마음이 아주 조용히 흔들렸다.


“나도 한 번 신어볼까?”


하지만 상상과 통장 사이에는

언제나 얇지만 단단한 벽이 있다.

나는 결국 적당한 가격대의 이탈리아 로퍼를 골랐다.

처치스는 다음 번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결혼과 이직이라는 인생의 중대 이벤트를 앞둔 시점.


나는 나를 지켜줄 무기가 필요했다.

‘내가 결혼생활을 잘 할수있을까?’라는

두려움이 목덜미를 조이던 그 순간—

왜인지 모르게 처치스 로퍼가 떠올랐다.


가격은 여전히 거만했지만,

이번에는 이상한 용기가 등을 밀었다.


오모테산도의 그 매장 문을 열고,

나는 아주 깨끗한 화이트 로퍼를 신어봤다.


숨이 나왔다.


너무 완벽하게 젠틀해서

설명도, 설득도 없었다.

내 마음은 이미 납득돼 있었다.


그리고 꽤 단호하게, 망설임 없이 사버렸다.

그 신발은 지금까지도

내 신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한다.


그 시절, 처치스는 한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쿄에서는 로퍼를 떠올릴 때

위시리스트에 한 번쯤은 오르는 이름이다.

어패럴 업계 사람들 사이에선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숨은 플레이어 같은 존재.


나는 지금도 처치스를 신고 출근할 때면

무의식적으로 신발의 안부를 확인한다.

가죽의 주름, 앞코의 각,

발을 딛을 때 나는 소리까지.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다고 브랜드 과시를 뿜어내는 건 아니다.

잘생겼으면서도 배려심 있는 사람처럼,

처치스는 ‘나 좀 봐’라고 소리치지 않는다.

그저 묵묵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제 역할을 한다.


처치스는 완벽한 조연이다.

그리고 조연일 때 가장 강하다.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면서

장면 전체를 망치지 않는 사람처럼.


유행의 최전선에 선 아이템은
자칫 가볍거나 쉽게 질린다.
그 옆에 처치스를 두면
마치 온도계의 수은주가 안정되듯
룩의 온도가 고르게 잡힌다.


이번 Miu Miu × Church’s 콜라보가

그 절묘한 예다.


영국 신사의 구두에, 이탈리아 소녀의 장난기가 더해졌다.

단정한 셔츠에 브로그 로퍼,

그런데 소매를 살짝 접고 양말은 장난스럽게 흘려 신는 식이다.


전통과 트렌드가 서로 기대며,

각자의 단점을 덮고 장점을 극대화한다.


여자가 신으면

클래식 속에서 기묘한 힘이 솟아나고,

남자가 신으면

그 진가가 폭발한다.

섹시하고, 감각적이며, 동시에 믿음직스럽다.


나는 안다.

인생의 방향이 흔들리고,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나는 다시, 처치스를 장만할 것이다.


처치스를 신는 순간,

나는 더 이상 평범한 내가 아니다.

마치 테일러드 슈트를 입은,

체격 좋은 보디가드를 발끝에 두른 듯한 기분.


그 신발은 말없이 내 발목을 지켜주고,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나를 앞으로 밀어준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근거 없는 확신마저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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