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키우며 깨달은 게 있다.
나는 점점 ‘인간’이라기보다 ‘야생동물’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처음엔 그저 귀여웠다.
볼살 통통한 얼굴, 장난기 가득한 눈빛,
“엄마~” 하며 안겨오던 포동포동한 존재.
그때의 나는 매일 감탄했다.
“아들은 또 다른 세계야. 완전 개구쟁이야…”
요즘 그 개구쟁이는 공룡이 되어버렸다.
약간의 분노조절장애 옵션도 함께 장착한.
요즘 내 하루는 ‘하지 마’로 시작해서 ‘그만해!’로 끝난다.
“하지 마! 제발 하지 좀 마!”
“그거 내려놔! 그거 누르면 안 돼!”
이 말들이 자동 반복 재생된다.
마치 내 몸 안에 ‘육아 확성기’가 내장된 것처럼.
밥상은 하루 한 번쯤은 엎어야 직성이 풀리고,
물은 컵이 아니라 바닥에 뿌리는 게 제맛이다.
종이란 종이는 모조리 찢어버려야 ‘창작의 혼’이 완성된다.
그의 하루는 늘 예술적이다. 다만 재료가 내 신경이라는 게 문제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마트 한복판.
드러누워 울고, 구르고, 관객(=행인들)을 향해 퍼포먼스를 펼친다.
그때마다 내 심장은 ‘욱—’ 하고 치솟는다.
그래서 내 입에서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멘트.
“진짜 한 대 맞아볼래?”
70% 농담, 30% 진심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 30%가 점점 커지고 있다.
가끔 여자아이를 키우는 친구 집에 놀러 가면 공기가 다르다.
향기롭고, 조용하고, 평화롭다.
핑크색 원피스, 머리핀, “엄마~ 이거 예쁘지?”
그리고 그 옆에서 차분하게 대화하는 친구의 모습.
그걸 보다 보면 나는 늘 속으로 중얼거린다.
“우리 집은… 왜 이렇게 전투적일까.”
우리 집엔 예쁜 머리핀이 없다.
대신 바닥엔 미니카가 굴러다니고,
공룡들이 식탁 위를 점령했다.
어느 날은 공룡 두 마리가 냉동실 안에서 발견됐다.
(도대체 왜 거기 있는 건데?)
그런데 또 밥 먹을 때 보면,
공룡들에게 밥을 떠먹이며 “이거 티라노 거~” 하는 아들을 보면,
엉뚱함, 그 장난기, 그 파괴력,
그리고 나만 보면 환하게 웃는 얼굴.
아, 이게 아들육아 인가 싶다.
하지만 어느 날 깨달았다.
“좋은 말로 될 때까지”는 이제 끝났다는 걸.
그래서 드디어 나도 매를 만들었다.
“하지 마”는 단 한 번만 경고한다.
두 번째는 바로 행동.
울고불고 난리가 나도,
그날 이후 달라졌다.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하기 전에
내 눈치를 슥— 본다.
그리고 내가 매를 드는 순간,
“으아아앙!!” 하고 먼저 소리를 지른다.
이게 뭐라고, 나도 모르게 약간의 승리감이 밀려온다.
물론 나도 매를 들고 싶진 않다.
그런데 아들은, 말로는 안 되는 생물이다.
몸으로 느껴야 멈춘다.
‘아들 훈육은 말보다 행동’이라는 말을
이제야 뼈저리게 안다.
육아서마다 말한다.
“만 3세까지는 때리지 마세요. 아기 말을 들어주세요.”
나도 그렇게 하려 했다.
진짜 열심히 했다.
그런데 만 2세쯤 되자,
나는 깨달았다.
이 아이는 ‘이성’이 아니라 ‘본능’으로 산다는 걸.
내가 말로 아무리 해도,
“하지 마라”는 말보다
“하면 큰일 나”를 몸으로 알아야 멈춘다.
그래서 포기했다.
이제는 ‘매’가 내 육아 도구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다.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그 장면이 지나면,
아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웃는다.
혼자 놀다가 다다닥 달려와 와락 안긴다.
미안함? 뒤끝? 그런 거 없다.
한마디로, 정신적 회복탄력성 MAX.
이렇게 깔끔하게 잊고,
다시 웃고, 장난치고, 또 사고 치고.
아… 진짜, 여자들의 세계랑은 너무 다르다.
우리에겐 감정의 잔상이라는 게 있는데,
남자애들은 ‘리셋 버튼’을 누른다.
그냥 삐빅— 시스템 초기화 완료.
가끔은 진심으로 감탄스럽다.
세상 복잡하게 살 이유가 뭐 있냐는 듯,
웃고, 넘어가고, 또 시작한다.
아들육아의 가장 크 장점은 이거다.
명료. 단순. 맑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