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첫 출근날, 내가 본 건 패션쇼 무대도, 디자이너의 스케치북도 아니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패션쇼 무대 백스테이지가
아니라,책상 서랍이었다.
그건… 작은 드러그스토어였다.
핸드크림, 립밤, 우카 네일오일, 미스트, 비타민, 초콜릿 조각, 그리고…
빠지면 섭섭한 그들만의 국민템,
나린(Nahrin) 허브오일.
사무실이든 쇼룸이든, 심지어 디자이너의 반쯤 무너진 책상 서랍 속에도 이 조그만 롤온 오일은
하나쯤은 꼭 있다.
‘진짜 나만 빼고 다 있네’ 싶은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다.
오후 3시, 점심의 잔열이 사무실에 눌어붙는 시간.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서랍을 열고,
나린오일을 관자놀이에 쓱쓱 바른다.
그리고 살짝 눈을 감는다.
그 표정이란… 꼭 여기가 도쿄 오피스가 아니라
스위스 산골짜기라도 되는 양.
“리프레쉬~”라고 속삭이며 산소를 충전하는
그 모습은마치 혼자만의 *숨은 의식(儀式)*을
치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너무 진지해서, 오히려 묘하게 웃겼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매일 보다 보니,
나도 어느새 슬그머니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제품 선택이었다.
태국 여행 가서 사 온, 좀 더 강하고, 좀 더 직설적인,
한마디로 냄새가 빡센 멘톨 오일이었다.
바르자마자 눈물이 찔끔.
효과는 확실했지만, 세련됨은 제로였다.
“무슨 약 냄새지..?”
그 순간, 내 알프스는 무너졌다.
알프스의 맑은 공기 대신,
사무실에 퍼진 건 ‘할머니 약방’ 풀세트 향기였다.
허브의 고요한 오후는 사라지고,
마치 내가 모든 직원의 관자놀이를단체로 문질러줄 것 같은 기세.
그날 이후, 나는 도쿄 허브계에서
비공식적으로 ‘멘톨 테러리스트’로 불렸다.
다시 입회하려면, 향부터 바꿔야 했다.
솔직히 처음 나린 향을 맡았을 땐 좀 시시했다.
익숙한 허브향, 기대만큼 강렬하지도 않고.
“이게 뭐 대단하다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매일 옆자리에서 은근히 그 향을 맡다 보면,
그 ‘평범함’이 이상하게 중독된다.
강하지도, 오래 남지도 않지만
사무실이라는 작은 생태계에 어울리는
적당하고, 눈치 있고, 예의 바른 향.
그러니까 좋지만 ‘너무 나대지 않는’ 향이다.
그게 이 도시 사람들다운 매너같기도하고,
그래서 요즘 내 서랍에도
태국 멘톨은 퇴출되고 나린 허브오일이 입주했다.
이마에 바르고, 관자놀이를 누르며
슬쩍 그들처럼 흉내 낸다.
“리프레쉬~.”
이 작은 동작 하나로
마치 나도 도쿄 오피스 생태계의 일부가 된 것 같다.
차이는 단 하나
그들은 ‘취향 있는 사람’이고,
나는 ‘취향에 감염된 사람’이라는 점.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도쿄 향에 길들여진 사람이다.
그리고 의외로… 이 포로 생활, 꽤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