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전부 백화점 지하 1층을 경유한다.

말보다 당도가 높다.

by Asparagus



일본에 살다 보면

인간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제과업계에 취직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뭘 그렇게 맨날 나눠 먹는지 모르겠다.


명절, 오봉, 골든위크, 연말.


살아 있어도 선물,

어디 다녀와도 선물,

출장 다녀와도 선물.


이쯤 되면 근황 보고가 아니라

당 충전 정기배송이다.


휴가 끝나고 출근하는 날 아침,

사무실 책상 위에는 늘 작은 박스들이 산처럼 쌓인다.

마치 새벽 사이 과자 요정이 다녀간 것처럼.


하카타 만주,

나고야 장어파이,

오사카 한큐 우메다 백화점에서만 판다는 과자,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치즈타르트까지.


전국 특산물이 한 평짜리 책상 위에서 박람회를 연다.


그리고 다들 말한다.

“별거 아니에요~”


아니,

이 정도면 거의 지역경제 살린 건데요.


여행의 추억은 본인이 가져가고

칼로리만 회사에 기부하는 풍경.


그래서 나는 가끔 생각한다.

일본 회사원은 연차를 쓰는 게 아니라

과자를 사러 지방 원정을 가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런데 무더위가 오면

이 문화는 한 단계 더 커진다.


오츄겐 시즌.


‘평소 신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라는 아주 단정한 풍습.


하지만 회사 풍경은 전혀 단정하지 않다.


택배 기사님이 하루 종일 들락날락하고,

사무실 한쪽에는 맥주 상자가 탑처럼 쌓인다.


프리미엄 맥주, 햄, 소면, 과일, 아이스크림, 양과자.


감사의 종류가 왜 이렇게 칼로리 중심적인지 모르겠다.


이쯤 되면 인사가 아니라

여름 대비 비상식량이다.


게다가 타이밍도 까다롭다.


도쿄는 7월,

오사카는 8월.


같은 나라 안에서

감사의 유통기한이 다르다니.


선물이 아니라

거의 물류 관리다.


백화점 지하에 가보면 더 재미있다.

사람들은 장을 보는 게 아니라

‘관계’를 고르고 있다.


멜론은 성의 있어 보이고,

소면은 무난하고,

맥주는 친근하고,

햄은 실속 있고,

커피는 안전하다.


감사에도 묘하게 등급이 있다.


며칠 지나면

회사 한쪽이 작은 창고가 된다.


맥주 탑, 햄 더미, 젤리 박스.


전부

“항상 신세지고 있습니다”의 실물 버전.


퇴근 시간쯤 되면

자연스럽게 분배가 시작된다.


“하나씩 가져가세요~”


난 거의 맥주랑 햄을 챙긴다.


상여금은 없지만

냉장고는 풍족하다.


가끔은 헷갈린다.


우리가 일을 해서 감사 인사를 받는 건지,

감사 인사를 나누기 위해 일을 하는 건지.


도쿄에서는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칼로리로 대답한다.


그런데 더 재밌는 건,

고마움 말고도 과자가 쓰인다는 점이다.


특히 ‘미안함’.


이 나라에서는

감사보다 사과가 더 비싸다


예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회사에서 다른 회사에 크게 폐를 끼쳤을 때,

정식으로 용서를 구하러 갈 때는

그냥 과자가 아니라

Toraya(토라야) 양갱을 들고 직접 찾아간다고.


편의점 양갱 같은 가벼운게 아니다.

백화점 지하에서 조명부터 남다른 그 가게.

호랑이가 그려진 단단한 종이가방,

각 잡힌 상자,

그리고 벽돌처럼 묵직한 양갱.


그걸 두 손으로 공손하게 내밀며 말한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폐를 끼쳤습니다. "


사과에도 시세가 있다면

토라야는 거의 선물계의 에르메스 같은 포지션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나도 본 적이 있다.


전 회사에서 물품납기를 못 맞췄을 때,

부장님이 말없이 그 가게 쇼핑백을 들고 나가셨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상상한다.


양복 입은 아저씨가 종이가방을 사 들고 나오면

‘아.. 사과하러 가시나?’

그런 생각을 문득문득 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웃기다.


이 나라는

감정을 말로 하지 않고

전부 디저트로 번역한다.


마치 인생 전체가

거대한 백화점 지하 1층 같다.


입은 늘 직구를 던질 준비를 하지만

표현은 꼭 그 지하를 한 바퀴 돌고 나온다.


그리고 도쿄에서

용서가 찾아올 때는

구구절절 긴 말 대신

호랑이 쇼핑백 하나면 충분하다.


달콤한 건

대체로

사람을 조금 느슨하게 만드니까.


우리는 그렇게

말 몇 마디 대신

당분 몇 그램으로

서로를 용서한다.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은 방식이다.

꽤 단순하고,

꽤 인간적인 방식.









9e4d20e77b487c37917b72d091dabae5.jpg toraya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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