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 숲 사이로 피카츄가 지나간다.

by Asparagus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를 포기하는 일이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귀여움만큼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유리로 반짝이는 고층 건물 사이로

포켓몬이 지나가고,

지하철 손잡이 아래로 도라에몽이 매달려 있다.


어른에게도

귀여움이 허락되는 도시.


출근길 전철 안에서

뮤츠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남자의 서류가방 끝에서.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뮤츠의 주인을 한 번 보고,

다시 뮤츠를 한 번 봤다.


…이 조합은 또 뭐지?


검은 수트,

왁스로 반듯하게 정리한 머리,

광이 번쩍 나는 구두.


그 완벽하게 ‘회사원다운’ 차림 끝에

보랏빛 전설 포켓몬 하나.


너무 안 어울려서

오히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벌칙인가.

아니면 진성 포켓몬 마니아인가.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땐

이런 장면이 꽤 충격이었다.


“중딩도 아니고... ”


그런데 몇 달이 지나자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이상한 건

뮤츠가 아니라

그걸 이상하게 보던

내 시선이었는지도 모른다.


도쿄에서는

정장과 캐릭터가 충돌하지 않는다.


그냥,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같이 출근한다.



유학생 시절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학교 가는 길,

사람들이 한곳에 우르르 모여 있었다.


처음엔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

저 정도 인파면

뭔가 큰일이다 싶었다.


가까이 가보니

모두 휴대폰을 들고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

포켓몬고


수트를 입은 직장인,

이를 악물고 화면을 노려보는 사람,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까지.


다 같이

보이지 않는 포켓몬을 잡고 있었다.


현실은 분명 아스팔트인데,

저 사람들 눈에는

다른 세계가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내 학교 가는 길은

유독 출몰 스팟이었는지

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나는 그 사이를 지나가며

“또 뭐 대단한 녀석이라도 떴나 보네.”

하고 중얼거렸다.


속으로는

저걸 왜 저렇게 열심히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 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휘두르고 있었다.

뒤늦게 입성해

레벨 43까지 찍고

조용히 은퇴했다.


결국나도

그 세계에 로그인하고 말았다.



요코하마에 놀러 갔던 날도 기억난다.


멀리서

노란 것이 우르르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엔 사고인 줄 알았다.

사람들이 길 양쪽으로 줄을 서 있고

카메라를 들고 웅성거리고 있었으니까.


가까이 가보니—


피카츄였다.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도 아니고

몇십 마리.


같은 표정,

같은 걸음,

같은 미소.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경이로웠다.


“아, 나 진짜 일본에 살고 있구나.”


현실인데

마치 게임 화면 안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포켓몬고 속 세상과

지금 이 아스팔트가 겹쳐보였다.


이건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집단적인 동심의 행진 같았다.


이 도시에서는

현실과 동화가

아주 얇은 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늘 붙어 있다.



한때는

도쿄에 여행 온 관광객들이

산리오 매장에서

“꺄, 귀여워!”를 연발하며

인형을 하나씩 사 가는 풍경을 자주 봤다.


요즘은

돈키호테 한쪽에서

몬치치 인형을 들고

똑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본다.


귀여움은

유행을 타는 듯 보이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만 바뀔 뿐이다.


10년 전만 해도

중고등학생 가방에 인형이 주렁주렁 달린 걸 보며

“가방보다 인형이 더 무겁겠다” 하고 웃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 가보면

가방에 뭐 하나 안 달린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다.


키링, 캐릭터, 작은 인형.


처음엔 감성 소비 같았는데

이제는 거의

집단적인 취향처럼 보인다.

어쩌면

한국도 조금씩

귀여움에 물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에 산 지도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알게 된 게 있다.


이곳 사람들 마음속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동화가

하나씩 들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건

한국 사람들도 어렴풋이 안다.


내가 일본에 산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이렇게 말한다.


“아, 일본? 귀여운 거 엄청 많잖아.”


스시도 아니고,

도쿄타워도 아니고,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일단 “귀여움”이다.


이상하게도

이나라는 ‘귀엽다’가 먼저 떠오른다.


어쩌면 그 말 속에는

이 도시를 향한

어떤 부러움이 섞여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귀여움은

아이의 것이 아니라

어른의 것이기도 하다.


빌딩 숲 사이로

피카츄가 지나가는 도시.


어쩌면 이곳은

어른이 되어도

마음속 동화를 삭제하지 않은 사람에게

조금 더 또렷하게 열리는 도시인지도 모른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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